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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6-26 18:26
프란치스꼬의 “수난 성무일도”
 글쓴이 : 기도의집
조회 : 10,576  

 

프란치스꼬의 “수난 성무일도”


Leonhard Lehmann, ofmcap.

김찬선 (레오나르도) 형제 역

(작은 형제회, 관구 봉사자)


이끄는 글


   프란치스꼬의 기도 중 두 개는 십자가와 관련이 있다. 성 다미아노의 십자가는 그에게 그의 사명을 계시하였다. 그는 십자가나 성당을 볼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로...”를 기도하곤 했다. 십자가는 그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묵상 주제였고, 그것은 또한 매우 자주 그의 기도의 초점이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시편을 가지고 주님의 수난의 길을 다시 더듬었다. 그는 물론 15세기에 시작되어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전통적인 14처의 십자가의 길을 몰랐다. 그러나 주님의 수난에 관한 그의 묵상 방법은 그의 후계자들인 프란치스칸들에 의해 전 교회에 보급된 십자가의 길과 매우 비슷했다. 그의 수난 성무일도에서 그는 그의 개인적인 첨언(添言)이 섞인 시편들의 인용을 가지고 만든 일종의 문학적인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


1. 창작은 아니지만 독창적인 작품


   샤를마뉴 대제 시대 이후, 공식적인 성무일도에 덧붙여 일종의 소성무일도(Breviary)나 성무일도(Office)를 바치는 관습이 퍼져 나갔는데, 특별히 열심한 평신도들에 의해 이 개인 신심은 성행되었다. 우리는 성 율리히(Ulrich +973)의 예를 알고 있는데, 그는 교회의 공식적인 성무일도에 덧붙여 십자가와 동정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성무일도를 바치곤 했다. 우리는 비록 강조점이 다르다 할지라도 프란치스꼬의 수난 성무일도에서 십자가와 성모님께 대한 이 두 신심을 본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수난 성무일도에서 아무것도 프란치스꼬는 새로 만들지 않고 그저 그 시대의 관습을 따랐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기존의 성무일도를 그저 받아들이지 않고 그 자신의 것을 지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수난의 어느 부분이 강조되었고, 어느 점을 그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했는지 보는 것은 흥미 있을 것이다.  


2. 시편에 대한 깊은 지식


    첫눈에 프란치스꼬의 성무일도는 모든 독창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사실 대부분이 시편 구절들과 다른 성서 인용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은 오직 두 예가 있다. 이 두 곳에서 그는 기존의 순서를 바꾸지도 자신의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체를 다 인용하지도 않았다. 이 두 예는 부활 시기 저녁 기도인 시편 8과 대림절 저녁 기도인 시편 13인데, 이들은 각각 구약의 시편 69편과 121편에서 따온 것이다. 이 성무일도의 그 밖의 시편들은 다른 시편 구절들과 신약 성서의 인용들과 다양한 자신의 첨언들을 쪽매붙임(mosaic)한 혼합 형태이다. 우리는 그가 그의 인용들을 아무렇게나 함께 연결시킨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고의 배열을 따르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것들을 한데 엮거나 구절들을 빼거나 그의 말을 덧붙였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는 성 제오르지오 성당 학교에서 시편을 가지고 읽고 쓰는 법을 배웠기에 시편을 자유 자재로 활용할 수 있었다1). 그는 당시 학교에서 시편과 복음을 교재로 사용했기에 시편을 실제로 외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당시 그러한 작품들이 불렸던 것처럼 그가 그의 개인의 “신심적” 또는 “축원하는” 성무일도를 짓게될 때 적절한 구절들을 찾으며 성서를 쭉 훑어보고 있는 그를 상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가 시편을 기도에 활용할 때 그는 대체적으로 어떤 시편을 그가 인용하는지 알지 못했다. 구절들 뒤의 괄호 안에 그 시편에 해당하는 자료 또는 그 인용이 취해진 곳을 제공하는 것은 그의 비판적 추종자인 우리들이다. 그는 특별한 성서적 장면 또는 신앙의 신비에 대한 그의 최초의 묵상을 가지고 그의 시편들을 지었다. 그 때 그는 그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성서 본문과 그 자신의 말들을 이용했다. 이것이 그가 수난 성무일도를 지은 실제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 목요일 저녁부터 부활 대축일 아침까지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에 자신을 국한시키지는 않았다.


3. 부활절 신비


   “주님의 수난 성무일도”(Officium Passionis)라는 세기에 걸친 제목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춘 묵상이라고 믿게 한다. 그러나 사실은 구원 역사의 다른 사건들-세상의 창조, 부활,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도 그는 그의 관심을 돌린다. 예를 들어 성 금요일 9시경을 위한 시편(수난성무 6)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뿐 아니라 무덤의 먼지로부터의 그분의 부활을 상기하고, 정의가 다스리게 하려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굳게 믿고 확언한다. 그래서 이 성무일도는 미사의 성변화 후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우리가 즉시 외치듯이 부활의 전 신비를 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프란치스꼬의 정신에 따라 그리스도의 수난을 이해해야 할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많은 고대 교부들, 예를 들면 알쿠인(Alcuin)이 그에 앞서 본 것이었다. 이 수난은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두 번째 오심을 포함하는 구원의 역사(役事)이다. 프란치스꼬는 이 모든 주축을 이루는 순간들을 상기하지만 주님의 실제적인 수난에 가장 큰 강조를 둔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이 성무일도를 이해해야 하는 법이다. 이 성무일도를 소개하는 글2)은 “이들은 우리의 지극히 거룩한 사부 프란치스꼬가 주님의 수난을 공경하고, 기억하며, 찬양하도록 지은 시편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씨시의 글라라 전기에서 토마스 첼라노는 글라라도 프란치스꼬와 같은 신심적 자세를 지녔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두 성인이 한마음이었음도 여기서 기록하고 있다: “그녀도 십자가의 연인인 프란치스꼬가 지은 대로 십자가의 성무일도를 배워 알았고, 그가 했던 것처럼 애착을 가지고 수시로 이 성무일도를 바쳤다”3).   말하자면 프란치스꼬는 부활의 신비 전체를 그의 마음 안에 간직하면서 수난의 신비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었다. 그는 주님 수난의 실제적인 사건들을 깊이 묵상하고, 성부께 사랑에 넘치는 그의 내어드림을 통해 몸소 이를 살았다. 그는 역사적으로 일어난 것을 신비적으로 살았던 것이다.


수난 성무일도의 구조


   성 프란치스꼬의 수난 성무일도는 전례 주년의 각 축제들을 위한 세 가지 다른 설계 또는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성삼일과 연중 평일을 위한” 첫 번째 짜임새는 일곱 개의 시편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 “부활 시기를 위한” 네 시편이 있는데, 그 중 두 시편은 첫 번째 짜임새에서 취한다. “주일과 대축일을 위한” 세 번째 짜임새는 세 개의 새로운 시편을 더한다. “주님의 대림 시기를 위한” 네 번째 설계는 다른 두 새로운 시편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탄생시부터 공현 8부까지를 위한” 다섯 번째 설계는 오직 한 개의 시편만이 있는데, 이 시편은 모든 시간경을 위해 바쳐지고 성무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가장 정교하게 공을 들인 시편이다4). 이제 우리는 총 15개의 시편 묵상들 또는 묵상된 시편들을 가지고 있고, 이 중 일곱이 성주간을 위한 첫 번째 짜임을 위한 것인데, 이는 주님의 수난이 이 성무일도의 주 주제임을 증거하는 또 다른 증거이다.


           

1. 시간경의 시작


   각 시편은 같은, 일정한 틀을 지닌다. 성인은 매 시간경을 주의 기도와 영광송 그리고 성무일도 전에 바치는 찬미경으로 시작하곤 했다.


     이 찬미경이 끝나면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여” 후렴을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성모 마리아 축일 시편을 먼저 외고 다음에 미리 선택한 몇 가지 다른 시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시편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수난 시편을 바쳤습니다.

  

   수난 성무일도에 관한 이 소개 주서(朱書)(introductory rubric: 전례 규범을 설명하고 지시하는 빨간색의 글)는 각 시간경을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을 성삼위의 하느님 앞에 위치시키고 그의 기도에 동반하며 유지시켜 주는 모든 천사들과 성인들 대열에 합류함을 얘기해 주고 있다. 그는 자신이 천상 교회의 승리와 굳게 결합되어 있으며 하늘과 땅을 일치시키는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시간경의 끝맺음


   모든 시간경은 시작할 때와 같이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여” 후렴과 영광송을 반복하며 끝냈다. 이것은 프란치스꼬가 삼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고 모든 성인들, 특히 동정 마리아의 중재에 자신을 맡기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이 끝맺음은 하루 종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바람을 엿볼 수 있는 찬미에의 장엄한 초대에 의해 강화된다: 살아 계시고 진실하신 주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우리는 항상 주님께 찬미와 영광과 영예와 찬양을 드리고 온갖 좋은 것을 돌려드리나이다. 아멘. 아멘.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성삼일과 연중 평일을 위한 시편들


   여기서 프란치스꼬 성무일도의 15시편 본문 모두를 싣고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자체만으로도 책 한 권을 필요로 할 것이다. 사실 단지 첫 번째 짜임새의 일곱 시편만을 여기에 끄집어내어 주석하는 것조차도 너무 긴 과정일 것이다. 우리가 첫 번째 짜임새의 세 시간경-우리의 매일 기도와 삶의 가장 중요한 세 시점과 부합하는 끝기도, 육시경, 저녁 기도-에 대한 재현과 묵상에 국한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침 기도, 일시경, 삼시경, 구시경의 시편에 대해서는 그가 이 시편들을 기도하고 있을 때 관상하고 있던 것의 일부 착상(idea)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일련의 생각(Trains of thought)을 간단하게 다룰 것이다.


1. 끝기도


후렴


거룩하신 마리아여

세상에 태어난 여인들 중에 당신 같으신 이 없나이다.

당신은, 지극히 높으시고 지존한 왕이신 천상 아버지의 딸이시며 여종이시옵고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성령의 정배이시옵나이다.

비오니, 성 미카엘 대천사와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모든 성인들과 함께

우리의 주님이시오 스승이시며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드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소서.


시편


1. 뜨내기 내 생애를 헤아려 두시고 * 이 눈물 당신 부대에 담아 두소서(시편 55,8b-9).

2.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나를 해칠 양으로 내 불행만을 궁리하며(시편 40,8a) * 나를 두고 서로 이야기하나이다(참조: 시편 70.10c).

3. 그들은 내게 선을 악으로 갚고 * 사랑 대신 미움으로 갚나이다(참조: 시편 108,4).

4. 내 사랑을 도리어 트집잡나이다. * 그러나 나는 기도할 뿐이외다(참조: 시편 108,4).

5. “거룩하신 나의 아버지(요한 17,11), 하늘과 땅의 임금이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 괴로움이 가까이 왔어도 도울 이 없삽나이다(시편 21,12).

6. 언제라도 내 당신을 부르는 그때, 원수들이 뒤로 물러가리니 * 하느님이 내 편이심을 나는 잘도 아나이다(시편 55,10).

7. 벗들과 동무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 근친조차 먼발치에 서 있나이다(시편 37,12).

8. 아는 이들 내게서 멀리하시고 그들 앞에 이 몸을 지겹게 만드셨으니, * 나는 갇혀 나갈 수도 없삽나이다(시편 87,9).

9. “거룩하신 아버지시여(요한 17,11)”, 멀리 계시지 마옵소서(시편 21,20) * 나의 하느님이여, 어서 나를 돕시옵소서(참조: 시편 70,12).

10. 주 하느님이여, 내 구원이시여 * 어서 나를 도와주소서(시편 37,23).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후렴


주석


여덟 시편 인용의 쪽매붙임(mosaic)과 첨가된 개인 생각들


   위의 시편들을 들여다보면 그의 시작(詩作)을 위해 프란치스꼬가 어떻게 시편들을 이용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시편 55,8b로부터 시편 40,8과 시편70,10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시편 108을 가지고 3절과 4절을 만들고5) 이어서 시편 21,12를 취한다. 시편 108,4와 21,12 사이에 그는 신약 성서에서 취한 하느님 호칭을 삽입하는데, 그는 자신의 시편 9절에서 짧아진 형태로 이를 다시 사용한다. 프란치스꼬의 이 시편에는 여덟 개의 다른 시편과 신약 성서에서 취한 인용들과 자신의 개인적인 첨가들이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호칭 “거룩하신 나의 아버지” 또는 “거룩하신 아버지”는 프란치스꼬의 기도의 지향과 목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편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실제로 구약 성서의 시편은 결코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 감히 이렇게 부르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운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 자신이 “Abba, 아버지”라 부르셨고(마르 14,36; 참조: 요한 12,28; 17,1),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루가 11,2).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이처럼 가득한 호칭을 시편에 편입시킴으로 해서 프란치스꼬는 시편을 그리스도교화 하였고, 말하자면 시편에 세례를 준 것이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호칭은 프란치스꼬 시편의 거의 모든 시편에 나타나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시편이 분명한 그리스도교적인 기도라는 표(表)를 갖게 했다6).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 기도하신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시편에서 프란치스꼬는 기도하는 인간의 삶이 지향하는 그분, 즉 아버지께 의심 없이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 기도하고 있는 것인가?   시편의 제일 첫 번째 절에서부터 명백하게 또는 은연중에 등장하는 대명사 “나” 뒤에 누가 숨겨져 있는가? 전 시편이 “나”와 “너”, “나의”와 “너의” 사이에서 오락가락 한다. 그것은 첫 번째 짜임새의 다른 시편들에서처럼 비탄과 애소의 시편이다. 이 시편들 안에서 우리는 고통을 당하며 도움을 찾고 있는, 그의 고통을 내보이며 의지할 데 없음을 비탄하는 누군가를 본다. 고통받고 있는 이 사람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이 시편 묵상에서 프란치스꼬는 성부께 기도하시는 그리스도께 귀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탄의 이유들과 그분이 비탄하는 방식, 그분이 찾고 있는 것과 어떻게 청하는가가 이 시편 전체에 흐르는 주요 주제이다. 그리스도는 프란치스꼬가 시편과 구약 성서 전체를 읽고 이해하는 기준이요 모범이시다. 교회의 교부들과 전례(典禮)처럼 그는 시편들을 통하여 빛나는 구세주의 구원 계시(messianic revelation)의 금맥과 시편들 안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본다. 시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의 스승이었다(참조: 갈라 3,24).


프란치스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께 기도한다


   프란치스꼬가 시편 안에서 성부께 기도하시는 그리스도께 귀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그 배경 안으로 완전히 젖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에서 드러나는 대명사 “나”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의 시편을 낭송하는 모든 이와 함께 프란치스꼬도 그 “나” 안에서 기도하고 자신을 내어드리며 그리스도의 비탄과 애소와 신뢰와 동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질병들로 고통받고 많은 형제들과 그 형제들의 다양성으로 인해 생긴 문제들로 부담을 안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상처들을 그의 몸에 지닌(2고린 4,10) 프란치스꼬에게 특별히 적용된다. 프란치스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하신 나의 아버지, 멀리 계시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의 체험들과 고통들을 그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속죄를 위해 고통을 당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더욱 더 잘 알아야만 했다. 좌우간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고 시편 안에서 그분과 동화하는 방식과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는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어떻게 오상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프란치스꼬가 했듯이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을 그토록 자주, 그토록 강하게, 또 그토록 자신의 것으로(personally) 묵상하고 떠올릴 때, 그 때 그 수난의 표지들과 상처들은 그 또는 그녀 안에 (실제로) 나타날 정도로 진전될 수 있다. 내적으로 보고 관상한 것이 그와 그녀에게 외적으로 드러날 것이며, 그들은 몸과 마음의 온 힘을 기울여 따르고자 하는 그분과 같이 될 것이다. 이것이 프란치스꼬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관상했던 것을 우리가 고찰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올리브 동산의 그리스도


   전례의 하루는 전날 저녁 기도로부터 시작하기에 전례적으로는 성 금요일의 끝기도(Compline)라 불려지는 성 목요일의 끝기도와 함께 프란치스꼬가 그의 개인적인 성무일도를 바쳤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소개 주서(朱書)는 “그 밤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시고 붙잡히셨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사실 프란치스꼬가 뽑은 시편들은 올리브 산을 연상케 한다. 우리는 1절 “오 하느님, 이 눈물 당신 부대에 담아 두소서”에서, 어떻게 그 구세주께서, 눈물 가득한 그분의 눈이, 핏방울 같은 그분의 땀이 당신의 성부께 고뇌로 울부짖으셨는지를 들을 수 있다. 2절에서 우리는 그 많은  군중에 의한 그분의 단죄의 증인들이다. 3절에서 우리는 세상의 배은 망덕에 대한 그분의 슬픔을 겪으며, 7절에서 모든 사람들, 심지어 그분의 가장 가까운 동무들과 추종자들로부터 버림받은 후의 그분의 고독을 우리는 느낀다. 이런 상황하에서 이 시편은 그리스도께서 “그러나 나는 기도할 뿐이외다”(4절)라고 계속 기도하심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얘기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 기도를 더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프란치스꼬는 “거룩하신 나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임금이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괴로움이 가까이 왔어도 도울 이 없삽나이다”(5절)라고 직접적인 어조로 이 시편을 이어 간다. 시편들을 취한 말들 안에서 프란치스꼬는 루가가 기술한 장면-“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에 떨어져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1-42)-을 놀랄 만큼 충실하게 재현한다.


   6절은 우리의 적들에 대한 마지막 승리를 관조하며 올리브 동산에서의 그리스도의 체포와 연관이 있는 기사, 요한 18,6의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7절은 그리스도의 비탄을 계속 이어간다: 그분의 동무들과 친지들은 상황이 위험해지는 것을 보자마자 재빨리 도망쳤고, 두려움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배반당하고 버려진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8절은 유다의 배반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의 비탄은 성부께 드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청원이 되는데, 이 청원은 10절에서 강화되고 “주 하느님이여, 내 구원이시여”라는 신뢰가 가득한 호칭으로 끝난다.


   올리브 동산의 그리스도께 대한 이 시편 묵상의 사고(思考) 연결은 프란치스꼬가 어떻게 주님 수난을 관상하였는지에 대해 알게 한다. 올리브 산에서의 장면-그리스도의 눈물, 그분의 원수들, 그들의 음모, 사랑 대신에 증오, 버림받음과 배반-은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 시편의 시작술(詩作術)은 외적인 고통에 대한 기술은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적 고뇌-한편으로는 그분의 슬픔, 실망과 고통, 다른 한편으로는 성부께 대한 그분의 무한한 신뢰-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성부께 대한 그리스도의 신뢰, 즉 성부의 손에 순종적인 자신의 내어 맡김이 이 시편에서, 특히 “거룩하신 나의 아버지”와 “거룩하신 아버지” 두 개의 호칭 안에서 강조되고 있다. 올리브 동산에서 비록 고통의 잔을 면하게 해 달라고 그리스도께서 간절히 요청하셨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성부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넘겨 드렸다. 따라서 프란치스꼬는 이 장엄한 시편에서 “아버지”라는 신뢰에 찬 말을 주님의 입에 담게 했다. 신자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자세를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맞추었습니다”(2신자 10).


2. 아침 기도: 고문의 밤


   아침 기도를 위한 시편은 끝기도의 시편처럼 쉽게 그리스도 수난의 단 하나의 특별한 장면과 연결시킬 수 없다. 아침 기도의 이 시편은 매우 이른 아침에 바쳐졌기에 우리의 주님께서 그 시간에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예수께서 병사들에 의해 조롱 당하신 것은 밤이 지난 매우 이른 새벽이었다.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밤새도록 어떻게 성부께 울부짖었는지 듣는다: “주 하느님이여 내 구원이시여, 낮이면 이 몸 당신께 부르짖고 밤이면 당신 앞에 눈물 흘리나이다”(시편 87,2)(1절). 그분은 시편 21,10-11의 말로 묘사하고 있는 당신의 성부와의 지속적인 일치를 상기하시고(4-5절), 이어서 즉시 대사제의 관저에서 병사들의 손에 넘겨져 받은 대우(루가 22,54; 63-65)를 떠올리게 한다: “당신만이 나의 수치와, 인욕의 나를 아시옵고, 나의 두려움을 아시나이다”(시편 21,10)(6절).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죽음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사악하고 광포한 자들에 대한 불평을 하신다(시편 85,14)(9절). 그분은 당신 앞에 오직 죽음만이 놓여 있음을 보신다(시편 87,5-6)(10절). 그러나 이 시편도 희망 가득 찬 표현으로 끝난다: “내 임금님, 내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지극히 거룩하신 내 아버지시니이다”(11절).


   성 목요일 밤에 대한 이 시편이 어머니와 모성을 여러 번 언급한 사실에서 우리는 프란치스꼬의 직관과 심리학적 통찰의 징후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탄생의 순간에로 눈을 돌린다. 그분은 당신이 시초부터 “모태로부터 당신을 나게 하신”(참조: 4절) 하느님 손에 있으며, “모태에서부터 당신은 내 주님이심”(시편 21,11)(5절)을 알고 계신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십자가 위의 그 고통의 순간에 그분의 어머니를 생각하였다고 우리에게 얘기해 주고 있다(참조: 요한 19,25-27).     


3. 일시경: 변모된 고통


   일시경의 시편에서 그리스도 수난의 어느 특별한 순간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찾아내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시편이 성삼일과 연중 평일에만 바쳐지지 않고, 마무리 주서(朱書)가 지시하듯이 “모든 일시경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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