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198
600
644,080
 
작성일 : 11-07-08 21:28
고백성사에 대하여
 글쓴이 : 기도의집
조회 : 10,462  

 

 

 

 

 

 

고백성사 예식

고백성사를 받는 예식은 환경에 따라 하나를 선택하되,
고백신부와 사전 협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제 1 양식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사제와 마주 앉아 고백할 수 있을 때)

고백자가 사제 앞에서 성호경을 그으며 시작한다.

(신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당신이 범한 죄를 사실대로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십시오.

(신자)○아멘.

○내 천주여, 나의 범죄로 만유 위에 사랑 받으셔야 할 당신의 마음을 상해 드렸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나의 모든 잘못에 대하여 진심으로 통회하나이다. 또한 당신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범죄의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결심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공로를 보시고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고백성사 받은 지(몇 일, 혹은 몇 주일, 몇 달)됩니다.

○죄의 고백(성찰한 죄를 일일이 구체적으로 횟수까지 고백 해야함)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

(사제) ○훈계와 보속을 준다.

○고백자의 머리 위에 손을 펴들고 - 혹은 바른손을 펴들고- 사죄경을 외운 다.

○사죄경 :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신자) 아멘.

(사제) 야훼님 좋으시니 찬미합시다.

(신자)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도다.

(사제) 주께서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신자) 감사합니다.

제 2 양식 (주일이나 판공 혹은 대축일을 앞두고 고백자가 줄을 지어 기다릴 때에)

고백자가 사제 앞에서 성호경을 그으며 시작한다.

(신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신부는 죄인에게 강복하소서.

○나의 범한 모든 죄를 전능하신 하느님과 신부님께 고백합니다.

○고백성사 받은 지 몇 일(혹은 몇 주일, 몇 달)됩니다.

○죄의 고백 (성찰한 죄를 일일이 구체적으로 횟수까지 고백함)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

(사제) 훈계와 보속을 준다.

사제는 사죄경을 외운다.

(신자) ○사죄경 끝에 - 아멘.

○감사합니다.

 


  

1장 : 고백성사는 예수님의 큰 선물

우리가 고백성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고백성사를 단순하게라도 정의하자면, '고백성사는 성세성사를 받은 신자가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 그 죄를 용서받고 교회와 화해를 하도록 인도하는 은총의 성사이다.' 라고 할 수 있다.

늘 부족하고 불완전한 우리가, 비록 성세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서, 새로운 생활과 더불어 천상 음식을 먹긴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항상 선용할 만큼 강하지는 못하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세속과 육신의 간교한 유혹에 빠져들고, 은총을 상실하게 된다. 그 결과 인간과 하느님의 친교가 파괴되고 단절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한 상태를 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하느님과 우리사이의 화해를 이룩하시었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직무는 지속적으로 사도들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맡겨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고백성사는 성세성사와 마찬가지로 '죽은 이의 성사'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죄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은총의 지위를 잃어 버렸지만, 이 성사를 받음으로서 다시 은총의 상태로 회복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를 교회로 불러 모아 구원하시고자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세성사를 통하여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주신 그리스도께서, 계속 이 사죄의 권한을 12사도에게 주심으로서 (마태 18,18) 이 고백성사가 제정된 것이다.

이것은 지상에서 맺고 푸는 권한의 효과가 ( 요한 20,22-23 ) 하늘에서도 그대로 유효한 권한이며, 이 권한은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그 협조자인 사제들에게 계승됨으로서 지상에서 죄를 사하는 그리스도의 직무가 존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제는 고백성사를 통해서 인간의 권한으로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까지 소급되는,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사죄권의 행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성화 시키는 것이며, 이 권한은 여러 세기를 걸쳐 교회 안에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을 통하여 행사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 고백성사의 방법 즉,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하는 방법 이외에는 죄의 사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결코 없는가? "하는 질문이 드물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즉, 고백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고, 이를 통해서 죄의 사함을 얻는 다는 것은 인정하여도, 꼭 사제 앞에 나아가서 고백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내키지 않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설정하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불완전한 처지를 아주 잘 아시는 그 분께서는, 우리가 가장 쉽게 할 수 있고, 가장 깊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죄 사함의 방법을 선택하시어 우리에게 건네 주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주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우리 육체의 고행이나 훼손을 원하셨거나, 스스로 감옥에 가서 일생 고백을 하며 살도록 원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혹은, 고백을 신부 앞에 가서 하는 대신에 가진 재산을 남김없이 교회에 바쳐야 한다고 하셨다면, 과연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우리가 죄 사함을 통해 구원을 받길 원해도, 현실적으로 이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고백을 통한 사죄의 방법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하고, 편리하며 쉬운 방법인지 모른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죄의 고백이 너무 쉽다고 생각한 나머지, 과연 이를 통해서 죄의 사함이 이루어지는지를 염려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시리아의 군사령관인 나아만이 품었던 의심과도 같은 것이다. (2열왕 5,1-14)

리아 왕의 군사령관으로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야훼께서 나아만을 들어 쓰시어 시리아에 승리를 안겨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둥병환자였다. 시리아군이 이스라엘을 쳐들어갔다가, 한번은 거기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아내의 하녀로 삼았는데, 그 하녀가 자기의 주인에게 일렀다. "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게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시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그가 문둥병쯤은 쉽게 고쳐주실 텐데요."

나아만은 시리아왕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아뢰고,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왕으로부터 많은 돈과 왕의 친서를 받아 이스라엘까지 아주 어려운 여행을 하여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나아만은 마차를 몰고 예언자 엘리사의 집에 이르러 대문 앞에 멈추었다.

엘리사는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강에 가서 그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그러면 새살이 나서 깨끗하게 될 것이오."

나아만은 화가 치밀어 발길을 돌리면서 말하였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그가 나에게 나와서 가지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이 문둥병을 고쳐 주려니 했다. 이럴 수가 있느냐? 다마스커스에는 이스라엘의 어떤 강물보다도 더 좋은 강이 있다. 여기에서 된다면, 거기에 가서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크게 노하여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를 막아 서며 말하였다. "만일 이 예언자가 더 어려운 일을 장군께 시켰더라면 장군께서는 그 일을 분명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장군께 몸이나 깨끗이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강에 내려 가서 일곱 번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마치 어린 아이 몸처럼 깨끗해졌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 왔을 때에는, 자기의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예언자 엘리사가 어떤 어려운 일을 시키더라도 기꺼이 다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그는 긴장을 감추지 않고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나아만이 엘리사로부터 받은 처방은 너무나 쉬운 것이었고, 심지어 자신이 그에게 우롱 당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여서, 분노를 참지 못해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나아만은 그렇게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서는 자기의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하는 고백성사의 방법도 이와 같다고 하겠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나약한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시다. 물론 나아만처럼 어떤 어려운 일이든 하겠다고 결심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대부분의 나약한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운 방법을 정하시어 죄사함의 길을 좁게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누구든지 쉽게 실행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정하셨는데, 바로 이 고백성사의 방법이라 하겠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죄를 몇 번이나 범했더라도, 예수님의 대리자인 고백 신부를 찾아가서 그 죄를 고백하면 간단히 그 죄가 사해 진다는 사실이 놀라운 선물이다.

달리 말하면, 국법을 어긴 대 죄인이 판사 앞에 나가서 "나는 이런 죄를 범했습니다. 제가 지금 깊이 뉘우치고 있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고 고백만 하여도 용서를 받게 된다면, 누가 그 고백을 마다하고 감옥에 가거나, 사형을 당하겠는가?

예수님께서 정하신 고백성사는 바로 이 방법인 것이다. 어떠한 죄인일 지라도 진심으로 회개하여 고백신부에게 고백만 하면 무조건 용서를 받게 되는 은총의 성사인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그렇게 쉽게 죄를 용서해 주시려면 더욱 쉬운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하느님한테만 고백해도 되지 않는가?"

사실 신부 앞에 나가서 죄를 고백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신부의 직무적인 면을 보기보다는, 인간적인 면을 우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신부 앞에 가서 고백을 하든지, 혼자서 가만히 하느님께만 고백을 하든지 간에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지금의 고백성사 방법을 따르도록 정하셨고, 이에 어떠한 예외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신부 앞에서 고백하여야 하는 이 방법이 본인에게 내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의 방법을 따를 수밖에 도리가 없다.

예를 들어, 정부가 국민에게 세금을 바칠 것을 법률로 정했고, 또 세금을 바치는 방법에 있어서도 세무서나 정부가 정한 은행 등에 바치라고 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 혼자서 생각해서 '세무서나 은행에 바치지 않고 직접 대통령에게 가지고 가서 바치는 것이 낫겠다.' 하여도, 그 방법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은 그 세금을 받지 않을 것이다.

고백성사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죄는 하느님께서 사해 주시지만 정한 사람, 즉 고백 신부를 통해서 먼저 고백하는 것을 듣고 나서 사해 주시도록 정하셨으니 우리는 그 방법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고백은 신부들에게 가서 하되, 단지 죄만 고백할 뿐 죄를 짓게 된 동기나 상황, 그리고 지금의 처지에 대해서는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우리가 병이 나서 병원에 갔을 때, 두통이든 복통이든지 현재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있게 된 동기까지 의사에게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을 먹어서 배가 아프다든지, 언제부터 두통이 심하게 되었다든지...... 자초지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환자 자신의 치료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고백성사에 대해서도 자신의 사정을 고백신부에게 낱낱이 고백하면 죄의 사함을 받는데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신부에게 어떤 종류의 죄를 알리게 되면 자기의 자존심을 상하게 되니까 좀 어려운 일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꼭 해야 할 의무이며 절대로 필요한 것이므로 자존심의 문제를 넘어선다.

이것은 죄의 사함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혹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다시 회복하느냐? 그렇지 않고 멸망으로 던져지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인데 자존심을 내세우고 이를 부끄럽게 여길 필요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적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에게 아무리 부끄러운 부분일지라도 보여야 할 것이고, 아무리 창피한 병이라도 그 병에 대해서 소상히 말해야 하는 것처럼, 상세하고 올바르게, 숨김없이 고백을 하지 않고는 죄 사함과 마음의 평화와 천국을 얻지 못한다.

이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사제 앞에서 죄를 고백하여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정하신 일이기에, 고백성사에 임하는 사람은 참으로 진실하고 거짓없이,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에 몇 가지 실례를 통해서 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베네딕도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뻴라지오 수사가 젊었을 때에 불행히 어떤 대죄를 범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 죄를 고백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로 인하여 그는 매우 큰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여러 해를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침 거리를 지나가던 한 순례자가 뻴라지오를 보고 갑자기 하느님의 묵시를 받아 그에게 말하기를,

 " 뻴라지오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고백하시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을 용서해 주실 것이고, 그로서 당신은 이제 마음이 평화로워질 것이요." 하였다.

그러나 뻴라지오는 완강히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고백성사를 받지 않아도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고백하기보다는 자기가 나름대로 정한 보속의 고행을 수행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겸손과 순명, 그리고 단식과 극기를 열심히 행함으로서 모든 수사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는 고백성사를 받지 않았어도 자신의 고행의 삶으로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죽자 수도원 전체가 슬픔에 빠졌고 그를 교회의 관습대로 장사 지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에 한 수사가 뻴라지오의 시체가 무덤 위에 얹혀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시체를 다시 무덤 속에 묻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역시 그의 시체가 무덤 위에 나와 있으므로 부득이 이 사실을 수도원장에게 보고하였다.

원장은 다른 수사들과 함께 무덤에 와서 뺄라지오의 시체를 보고,

"뻴라지오여, 당신은 살았을 때 순명을 잘 하였듯이 지금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하여 주시오. 그대는 지금 연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오? 아니면 당신이 시체를 더 좋은 곳에 묻으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고 무덤 밖으로 나온 것이오? "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시체가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 아! 불행한 나는 모고백 했던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으나, 모두 허사가 되어 지금은 지옥에 있습니다.고백성사를 보지 못해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 이 불쌍한 시체를 여기서 끌어내다가 짐승들처럼 들판에 묻어 주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세상에서 고백성사의 중요성과 유익성을 깨닫지 못하여 죄 사함과 구원을 얻지 못한 슬픈 일들 중의 하나이다.

만일 뻴라지오가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단 한번만이라도 자기의 죄를 숨기지 않고 고백성사의 효과를 받아들이고 고백을 했다면, 그는 구원받아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잘못된 생각이 그를 멸망에로 떨어뜨린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죄의 사함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백성사 이외에 어떠한 선행이나 고행, 극기, 기도의 대가로도 부족함을 알게 해주고 있다.

이러한 모고백의 불행한 결과에 대해서 또 한가지 예화가 있어서 소개한다.

떤 수녀가 소녀 시절에 큰 죄를 범하였는데, 그 죄를 고백하지 않고도 달리 사함을 받을 방법이 없을까 하고는 끝내 그 죄만은 고백을 않고 숨겨 오다가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녀는 수녀원 규칙도 잘 지키고 열심하여 모든 수녀의 모범 인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원장까지 되었다. 그는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 하여 그 직책을 완수하고 남이 보기에 갖은 성덕을 닦다가 죽었다.

그런데 그 원장이 임종하자마자 여러 수녀들 앞에 불바다가 나타나고, 그 화염 속에서 금방 임종한 원장이 실망에 찬 큰 소리를 지르며 말하기를,

“ 나를 위하여 연도도 바치지 말라. 나는 소녀 시절 때의 고백하지 않았던 어떤 죄 때문에 지금 지옥에 와 있다. 세상의 어떤 선행이나 공덕도 고백성사로 씻어질 죄를 씻지 못함을 알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똑같이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백을 하는 중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그 동안 숨기고 싶었던 죄를 한번이라도 고백했다면, 그는 자신의 선행과 공로를 통해서 천상의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스스로 이 고백을 숨김으로서, 이 세상에서나 후세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지옥에 빠뜨리고 만 것이다. 이런 불행한 사람의 죄와 수를 없애기 위해서는 올바른 고백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또한 고백은 현세에서 우리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본다.

떤 구두장수가 한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해, 그만 자기의 어린 조카를 쇠 연장으로 때려 죽였다. 물론 살인할 의사가 없었던 중과실치사였다. 그는 이 과실을 다른 사람이 알까봐 두려워서 밤중에 그 시체를 몰래 묻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 일을 까맣게 모르고 여러 날 동안 그 아이를 찾으면서 별 생각을 다 하였지만, 아무도 그 구두장수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은 수수께끼로 미궁에 빠졌다.

그런데 평소에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술 잘 마시고 노래 잘하며 유쾌하게 잘 놀던 구두장수가 ,그 날부터는 쇠망치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아무 원기도 없이 지내더니, 갑자기 집안 살림을 팔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조카를 잃은 충격을 못이긴 탓이라고 측은하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모든 시름을 잊고 아무 근심도 없이 행복하게 살아 보려고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런 후 2년이 지나서,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그만 자수하고 모든 사실을 고백해 버렸다.

취조가 시작되고, 숲 속에 묻은 아이의 시체가 검시되고, 재판수속이 끝났다. 판결을 내리기 전에 판사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을 때는 사람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고 안심하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떠났을 텐데 왜 다시 돌아와서 자수를 하였소?”

 “판사님, 내가 미국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셨다면 크게 틀린 생각입니다. 사실 아무도 내가 한 비밀을 알 사람이 없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 날부터 환상이, 피투성이가 된 아이가 언제나 내 눈앞에 나타나 잠을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답니다.이제 나는 감옥에 들어가도 좋고 사형을 받아도 좋습니다. 다만 하루라도 빨리 이 괴로운 양심의 가책만 면할 수 있다면......”하고 대답하였다.

위의 예화를 읽고 나면, 우리는 고백성사가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는 데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또 한번 느끼게 된다. 고백을 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평화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것은 우리의 발바닥에 가시가 들었을 때나 눈에 티가 들어갔을 때, 그 가시나 티를 빼기 전에는 아무리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로 감아 놓아서 보이지 않게 하더라도, 그 고통과 상처는 절대 아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고백성사는 특히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영혼을 위해서 가장 큰 기쁨과 위안을 준다고 하겠다.

 

2장 : 꼭 필요한 고백성사

우리는 제 1 장에서 예수께서 고백성사를 만드셨다는 것과, 우리가 양심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현세의 삶의 위안을 위해서 고백성사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앞에서 기술한 고백성사의 필요성 이 외에도,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고백성사야말로 우리의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필요한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즉, 아무리 선행과 고행을 행하여도, 올바른 고백 없이는 누구도 천국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의 예화 하나를 살펴보자.

떤 처녀가 불행하게도 부끄러워서 고백 못할 대죄를 범하고 난 후, 너무나 답답하고 너무나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그날 그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런 이유를 모르고 그 처녀를 위로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처녀는 시간이 가고 날이 지나가면 좀 나아지리라고 생각하였지만, 더욱 무서운 가시에 마음이 찔리는 듯하였다.

그런 동안에, 매우 열심하고 덕망이 있던 친구 한 명이 중병에 걸린지 불과 수일만에 죽게 되었는데, 얼마나 죽음을 잘 예비하였던지 천사처럼 깨끗하게 선종하는 것을 그 처녀도 목격하였다.

그 친구를 장사 지낸 지 며칠 후 어느 날 밤, 이 가련한 처녀가 깊이 잠들었을 때였다. 누구인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그런데 그 소리는 분명히 죽은 친구의 소리였다. 처녀가 겨우 정신을 차려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데,

 “잘 고백해라…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분인지 알거든 고백을 하여라.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지 알거든......”이라고 하였다.

가련한 처녀는,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그 죽은 친구를 시켜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비로소 용기를 내어 그렇게도 부끄럽고, 근심스럽고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그 죄를 시원히 고백하였다.

고백실에서 나오는 그 처녀의 마음은, 마치 무겁게 누르던 짐을 벗어버린 것처럼 가벼워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 그 처녀는 친구들에게 항상“고백성사를 보아라.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분인지 알 것이다. 고백성사를 받기만 해 보아라.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자애로우신지......”라고 거듭거듭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백을 올바르게 잘해 왔으면 우선 그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 이후에도 항상 올바른 고백성사를 받도록 힘써야 한다.

만일 고백을 자주 해 왔으나 그것이 모고백으로 일관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모고백으로 이어진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고백의 결과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지옥의 영원한 벌이다. 어쩌다가 한번 모고백을 하게 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모고백을 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멸망은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

성인들은 지속적으로, 올바른 고백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지옥에 빠진다고 하였다. 이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다음의 예화를 보면 그 까닭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녀 데레사가 어느 날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에서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불꽃이 타는 거기에 매우 깊은 수렁이 열리더니 불쌍한 영혼들이 수없이 그리로 떨어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너무나 무서워서 하늘을 향해 눈을 크게 뜨고,

“오, 하느님이시여,”하고 소리쳤다.

“오. 하느님이시여,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이 대체 무엇입니까?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 많은 영혼들이 어떤 영혼들입니까? 이교인들이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이 영혼들이 어떤 영혼들입니까?”하고 물었다.

“데레사야, 네가 지금 보는 저 영혼들은 너와 같은 신자들의 영혼이란다.”

“주님,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영혼들이 지옥에 떨어진단 말입니까?”

“그것은 올바른 고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레사야, 너는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계시를 말해 주고, 신부들에게도 고백의 중대성과 모고백에 대해서 자주 강론하고 자주 권면하라고 하여라. 나의 신자들이 이 좋은 성약을 독약으로 변화시키고, 자비와 용서의 성사인 이 고백성사를 악용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설마 모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성 알퐁소와 성 필립보 네리와 성 레오나르도 마우리시오는 이구동성으로 불행하게도 모고백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백실에서나 임종하는 사람들의 베개 옆에서 무수한 고백을 듣던 신부들이 자주 이 슬픈 경험을 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사르네리 신부가 말하기를,“불행히도 주위에는 모고백하는 사람이 많다. 오랫동안 경험한 신부들은 잘 아는 사실이다. 이것을 모두다 공심판 때 알고 나서는 깜짝 놀랄 것이다. 큰 도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심지어 열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도 모고백은 많이 행해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 모고백의 정의에 대해 다음의 예화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수회의 한 수사신부가 중병에 걸린 어떤 부인의 초청을 받아, 마지막 고백을 듣고 사죄경을 외우려고 손을 드는데 시커먼 쇠(釗)손이 신부의 손을 떨쳤다.

그 신부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부인에게,

“여보시오, 부인, 혹시 당신이 무슨 죄를 일부러 빠뜨리고 있지는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결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신부님, 저는 나흘 동안 고백성사를 준비했습니다”하고 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신부가 잠깐 눈을 감고 기도하고 나서 다시 사죄경을 외우려고 하는데, 또 다시 그 시커먼 손이 말리는 것이었다. 신부는 다시 부인에게,

“부인, 혹시나 부끄러워서 고백하지 못한 죄가 없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신부님은 저를 모욕 하셔도 분수가 있지요. 제가 그래 모고백을 하였다고 여기십니까?”하고 분개하였다.

신부가 또 다시 사죄경을 외우려 하였으나 그 쇠(釗)손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이 이상스러운 사실 속에는 하느님의 무슨 암시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 신부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부인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부인, 당신의 영혼을 스스로 배반하지 마시고 당신의 영혼을 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서야 부인이 뉘우치고 울면서 말하였다.

“신부님, 사실 제가 15년 전부터 모고백으로 살아 왔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생각을 못할 정도로 모고백이 많다. 설마 고백성사를 보는 사람들이 일부러 모고백을 할까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바로 우리 안에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모고백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모고백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타는 것도 참혹한 일이겠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느끼는 양심의 가책과 공포 그리고 불안과 전율도 참혹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성 요한 보스꼬 신부는 고백성사에 대한 그의 저서 가운데 이러한 말을 썼다.“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혹 대죄를 숨겼다든지, 혹은 죄를 올바로 고백하지 않아 영원한 멸망에 빠지는 신자의 수를 생각할 때 손이 떨린다”

  정말 올바른 말씀이다. 누구든지 어떤 대죄를 일부러 바로 고백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예를 들면, 어떤 신자가 간음죄를 실제로 행하고는 생각으로만 범했다고 한다든지, 대죄를 범한 횟수를 숨긴다든지, 혹은 그 죄가 대죄가 되고 또한 다른 대죄를 겸한 경우를 숨긴다든지, 고백 신부의 중대한 질문에 바른 대답을 하지 않아서 판단을 그릇되게 한다든지, 부끄럽다고 대죄를 숨기고 일부러 고백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등등의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언제든지 모고백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나중에 잘 고백하지 않고, 고백하기를 뒤로 미룬다.

  성 필립보 네리의 말씀을 들어보면, "대개 고백은 항상 임종 때의 고백처럼 해야 한다. 모고백하는 이들은 살기 위하여 고백을 하니까 부끄러워하고 속이고 올바르게 고백을 하지 않게 되지만, 내가 잘 죽기 위하여 고백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Copyright http://www.prayhouse.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