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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7-23 18:33
성 도미니코 사제
 글쓴이 : 기도의집
조회 : 10,960  

 

Saint Dominic Adoring the Crucifixion-ANGELICO,Fra.

1440s.Fresco,239x177cm.Convento di San Marco,Florence

 

축일:8월 8일

성 도미니코 사제

St. DOMINIC de Guzman

S. Domingo de Guzman
San Domenico di Guzman Sacerdote e fondatore dei Predicatori

(Burgos, 1170? - Bologna, 6 agosto 1221)
Born:1170 at Calaruega, Burgos, Old Castile
Died:4 August 1221 at Bologna
Canonized:13 July 1234 by Pope Gregory IX at Rieti, Italy
Domenico = consacrato al Signore, dal latino

Name Meaning:belonging to God (하느님께 속하다,하느님께 봉헌하다)

(라) DOMINICUS, (영) DOMINIC, (프) DOMINIQUE,(에) SANTO DOMINGO DE GUZMAN

도미니꼬회 창설자, 천문학자의 주보

 

 

도미니코 수도회는 천주교 수도회들 중의 하나이며, 성 도미니코 (1170-1221) 창립자의 이름에 따라

도미니코 수도회 또는 도미니코회 (한자:道明會)라고 부릅니다.

사명은 설교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설교자들의 수도회

(설교자회, 라틴어: ORDO FRATRUM PRAEDICATORUM [O.P.] )라고도 합니다.

 

본 수도회의 모토는

회원 성 토마스 아퀴나스께서 요약하신 대로 "진리를 관상하라 그리고 전한다"

(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입니다.

밤낮으로 하느님의 계시된 진리를 공부와 기도함으로서

알 게 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설교와 가르침으로서 전하는 뜻입니다.

 

 

도미니코는 어느 곳을 가거나, 누구와 함께 있거나, 항상 사람들을 격려하는 말을 했다.

그는 많은 교훈적인 이야기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세속을 하찮게 여기도록 이끌었다.

어디에서나 그는 말과 행동으로 복음의 사람다운 모습을 보였다.

낮에는 형제들과 동반자들 사이에서 그만큼 다정한 사람이 없었으며,

밤에는 그만큼 온전히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온갖 탄원을 바치는 데에 몰두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미니코의 시성을 위한 움직임은 1233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공식적인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그를 아는 사람 9명이 볼로냐에 소환되어 증언했다.

그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도미니코가 그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던가를 상상할 수 있으며,

그들의 증언은 초기의 다른 증거들로써도 확인된다.

그들의 증언에 초기의 다른 증거들을 보충하면,

도미니코가 얼마나 명랑하고 붙임성있는 사람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끊임없이 열렬히 기도했었다는 증언을 누누이 듣게 된다.

그는 흔히 밤새도록 기도하곤 했는데, 때로는 상당히 시끄러웠다.

그의 신음소리와 울음소리에 형제들이 잠을 깨기도 했다. 참으로 그는 쉽게 감동했다.

그는 전례 중에, 또는 스스로 설교할 때에도 곧잘 흐느껴 울곤 했다고 많은 증인들이 보고했다.

 

역사에 나타난 도미니코의 전성기의 모습은 친근하고 사랑스럽고,

남들과의 관계에서 솔직한 사람이면서도 무언가 결정할때는 단호하고,

교회와 복음의 진리에 열렬하고 헌신적인 사람이며, 아울러 여러 가지 운동이나 공식적인 교회의

한계선 너머에 있는 참 가치들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이였다.

그는 분명히 괄목할 만한 용기의 사람이었으나, 나약하고 수줍은 사람들을 위협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의 동료 한 사람은 "나는 내가 그렇게 좋아할 만큼 하느님께 봉사한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는 일찍이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더 영혼 구원에 대하여 뜨거운 열정을 가졌다"라고 증언했다.

또 다른 이가 증언한 바와 같이 "그는 부자나 가난한 이나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다."

 

 

 

도미니코의 후계자가 된 복자 삭소니의 조르단은 도미니코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는 언제나 꿋꿋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성격은 연민이나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일 때 외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성격이었다.

"기쁜 마음은 얼굴 표정을 기쁘게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도미니코는 인자하고 기쁜 표정을 통하여 자기 영혼의 평온을 드러내 주었다.

 

만일 하느님의 빛을 받아 무엇인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면

그 목적에 매우 항구하며, 충분히 숙고한 후에 공식으로 발표한 어떠한 결정도

좀처럼 변경하지 않았으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좋은 양심의 표시라 할 크나 큰 기쁨이 빛났기 때문에

"그의 밝은 얼굴 빛이 무색해 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는 쉽게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다.

거의 대부분이 그를 보자마자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하든지, 누구의 집에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있든지,

혹은 제후들이나 고위성직자나 그외 중요 인사들과 사귀든지간에

그는 언제나 영감적인 언어 구사가 풍부했고 유익한 일화가 넘쳐 흘렀으며,

어디에 있든지 말로도 행동으로도 복음의 사람임을 보여 주었다.

 

그가 선종했을 때 형제들은 그와의 이별을 아파했으나,

살아 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 많은 도움을 주겠다던 그의 약속을 굳게 확신했다.

13세기의 한 설교가는 도미니코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실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했으며,

그후 수세기 동안 남녀 도미니코회원들은 똑같은 신념으로 한결같이 그에게 도움을 청해 왔다.

 

 

도미니코의 이 세상 생애는 1221년 8월에 끝났으나, 남녀 수도자의 마음속에 그에 대한 기억은 살아 있다.

세상도 비록 그것이 그의 목소리인 줄을 모른다 하더라도 예나 다름없이 오늘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가 말한 바와 같이

"도미니코의 설교하는 목소리는

그의 제자들의 설교 속에서 오늘에도 여전히 들려오고, 앞으로도 계속 들려올 것이다."

 

도미니코가 생전에 시작한 위대한 이상은 교회 내 많은 남녀에게 전해졌을 뿐 아니라,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 헝가리의 성녀 마르가리타, 성 대 알베르토,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성 빈첸시오 페레르, 복된 프라 안젤리코, 사보나롤라, 교황 성 비오 5세, 리마의 성녀 로사,

바르톨로메오 데 라스 카사스,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빗지루 수사),

아시아의 수백명의 순교자들 그리고 세상과 교회의 생활과 사상과 신심에

여러 가지로 나름대로 영향을 끼친 많은 사람들의 업적을 통해서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 멀리까지 전파되어 왔다.

(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www.opkorea.org)

 

 

도미니코가 주교와 함께 여행하지 않았다면 그는 명상적인 생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주교와의 여행 후에 그는 행동적이면서도 명상적인 사도직을 수행했다.

그는 스페인 중부의 엣 캐스틸 왕국에서 태어나 사제인 삼촌에게서 사제직을 위한 교육을 받았으며,

예술과 신학을 공부했고 오스마 대성당의 주임 신부가 되어 평범한 사도적 생활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직속 주교와 함께 북유럽을 여행하던 중 그는 랑그도크에서 적의에 찬 알비파 이단과 정면 충돌을 했다.

 

알비파-카타리파 "순수주의자들"-는 이 세상에 선과 악이라는 2가지 원칙이 있음을 주장했다.

모든 물질이 악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강생과 성사를 부정했다.

똑같은 원칙 위에서 그들은 출산을 금했고, 최소한의 음식과 물만을 먹었다.

그들은 일반 신자가 따를 수 없을 만큼 정결했고,

금욕주의에 따라 영웅적이라 할 만한 영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도미니코는 이단과 싸워야 하는 교회의 어려운 처지를 느꼈으며,

이단과 대항하여 선교하는 십자군으로 활약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설교가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일반대중은 알비파의 금옥적인 영웅들을 찬미하고 추종했다.

가장 훌륭한 여관에 머물면서, 시종과 수행원을 거느리고 여행하는 가톨릭 교회의 대변인에게서

감명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도미니코는 3명의 시토 수도회 수사와 함께 복음서의 말씀(이상)에 따라 순회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12년 동안 이 일을 계속했고,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동료설교자들은 점차로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되었고,

1215년에 도미니코 수도원의 기원이 된 수도원을 툴루즈에 세웠다.

그는 열성적인 설교가일뿐 아니라 조직과 통솔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이상과 수도원의 이상은

하느님,학문연구, 모든 종류의 기도,하느님 말씀에 따라 인간에게 베푸는

구속 사업과 관련된 조직 생활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그의 이상은 "명상의 결과에 따라 나아가는 것",

또는 "오직 하느님에 대하여, 하느님과 함께 말하는 것"이었다.

 

운명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겸손과 청빈한 생활을 보물과 같이 소중히 여기라고 충고하였다고 한다.

13년 후인 1234년에 교황 그레고리오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The Glory of St Dominic-RENI, Guido.1613.Fresco.San Domenico, Bologna

 

도미니코회의 이상은 모든 종교 단체의 이상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다른 사람들이 단순히 칭찬할 뿐 아니라 본받도록 하는 것이다.

명상과 활동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은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명인 동시에 트럭 운전사인 존 스미스의 사명이기도 하다.

습성이 된 명상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지속되는 평온함이며, 풍요로운 인간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 활동의 원천임에 틀림없다.

 

 

 

전설에 따르면, 도미니코는 하느님의 분노로 위협받는 죄많은 세상이

성모님의 중재로 구원받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 성모님께서 당신의 아들로 두 사람을 지적했는데 한 사람은 도미니코 자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낯선 사람이었다.

다음날 교회에서 도미니코는 꿈속의 그 낯선 남자가 누더기를 입은 거지 차림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거지에게로 가서 그를 껴안고 환영하면서

"당신은 나의 친구이며, 나와 동행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결합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우리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거지는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였다.

 

 

두 설립자의 회원들은 일 년에 두 번 기념식을 거행한다.

도미니코와 프란치스코의 축일에 도미니코회 수사와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각각 자기들 교회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그 다음에는 "7세기 동안 결코 모자라본 적이 없었던 빵을 먹기 위해 같은 식탁에 앉는다."

(버틀러,"성인전")

.

 

가톨릭의 큰 수도회 중에서도 도미니코회는 규모가 크며 유명한 수도회중 하나이다.

그 창립자가 바로 지금 말하려는 스페인의 칼렐류에가 출신인 성 도미니코 데 구스만 이다.

 

그의 아버지는 펠릭스 데 구스만이요, 어머니는 귀족 폰 아자 가문의 요안나인데

두 분 모두 신심이 두터운 분들로서,

어머니 요안나는 1828년 복자위에 오른 분이다.(Bl.JOAN of Aza 축일:8월8일)

도미니코는 이러한 부모에게서 1170년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모님의 철저한 감독아래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7세때에는 어머니의 삼촌이 되는 경건한 신부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4세의 소년으로 일찍이 팔렌시아 대학에 입학해

그로부터 10년간 열심히 학문을 연구하고 24세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그는 스페인의 오스마 주교좌 성당의 참사 회원이 되었다.

이 참사 회원들은 장백의 (長白衣)에 두건(頭巾)이 달린 망토를 착용했는데,

이것이 도미니코회의 수도복이 된것이다.

 

젊은 신부 도미니코는 모든 임무를 자기 양심에 만족될 정도로 완수했으며,

때로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철야기도를 했다.

얼마 후 참사회 부원장이 되었고, 1201년에 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를 더욱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 하느님의 뜻이었던지,

1203년 스페인 왕 알폰소가 그의 왕자를 남 프랑스 왕후(王侯)의 딸과 결혼을 성립시키기 위해

사절을 보낼 때 도미니코도 일행에 끼게 되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에게 모두 큰 감명을 주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연마한 성덕과 두터운 애정,

우아한 성격이 그들에게 신성한 위품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절단은 남 프랑스에까지 도착했으나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으나,

그 목적하던 공주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할 수 없이 방향을 바꾸었는데 돌아오는 길엔 아비파의 이단으로 인해 소란한 지방을 통과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교황 사절로 시토 수도원장인 아놀드와 베드로 카스텔로가 1년 전부터 파견되어 있었다.

이 두분은 설교와 권유와 기타 모든 힘을 다하여 이단자들의 회개를 위해 일했으나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는 "당신들이 이단자들의 회심을 바란다면 그들처럼 가난하고 겸손하며

고해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고 권고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충고를 한 사람은 디에고 주교였다. 도미니코도 그 의견에 흔쾌히 동의하고

교황 사절을 도와 청빈의 검소한 생활을 하며 엄격한 고행을 실행했다.

 

이 성전(聖戰)의 전우 디에고 주교는 애석하게도 1207년 임종했다.

그러나 도미니코는 여전히 그런 생활을 계속하여 1215년에 이르렀다.

그동안 이교도의 미움을 사게 되어 여러 번 암살 당할 뻔 했으나

그때마다 주님의 특별한 도움으로 그 난을 면했다.

원수들은 술책을 바꾸어 이제는 공개 토론을 하자고 하였다.

도미니코는 물론 이를 받아들여 보기좋게 그들을 논파하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St Dominic-FERNANDEZ, Gregorio

Polychrome wood.Church of San Pablo, Valladolid

 

그가 강론때 특별히 강조한 것은 사람들에게 가끔 성모송을 외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수는 일정 수에 달하도록 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묵주 기도의 시작이었다.

그의 제창은 큰 반향을 일으켜 마침내 많은 신자들이 성모송을 위우기위해 묵주를 사용했다.

 

도미니코는 종교상의 여러 가지 폐단은 종교 지식의 결핍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설교와 종교 교육을 주로 하는 수도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늘 느껴왔기에 디에고의 별세후 도미니코는

수명의 동료 신부들과 설교와 종교교육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동안 툴루즈 주교의 도움으로 새 수도회를 조직하고 그 수도복은 전술한 바 참사 회원복을 그대로 착용했다.

또 두 서너 교구에서 그 교구의 주교가 될 것을 요청해 왔으나, 겸손한 도미니코는 모두 거절해 버렸다.

 

1215년에는 6명의 회원이 모였다.

도미니코는 글들을 툴루즈에 있는 어느 가옥에 거주케 하고,

 박사인 알렉산데르를 원장 겸 지도자로 정하고,자기는 인가를 얻기 위해 로마 교황청으로 향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개인적으로는 그를 인정하고 싶었으나

당분간 새 수도회는 일절 인준치 않기로 결정한 관계로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주님의 묵시도 있고 해서 결국 임시 허가를 했다.

 

도미니코는 하느님의 묵시로 아시시에 있는 프란치스코가 성인인 줄 알고

프랑스로 귀환하기 전에 그를 방문하고 진실한 우정을 맺었다.

그가 툴루즈에 다시 왔을 때는 회원이 이미 17명이나 되었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율을 기초로 회칙을 편찬하고,

그 회의 목적인 설교와 수도 생활에 있어서도 세말한 규칙을 제정햇다.

그리고 회칙의 인가를 얻기 위해 그는 다시 로마로 향했다.

그때는 이미 전 교황 이노첸시오 3세는 서거하고

그 후계자인 호노리오 3세가 ’설교 수도회’라는 명칭하에 그 규칙을 인가했다.

그리고 친히 도미니코의 설교를 청취하고 그 회원 중 한 명을 측근 신학고문으로 세우도록 했는데,

그 제정은 오늘에 있어서도 시행되고 있다.

 

 

도미니코는 급히 서둘러 툴루즈로 돌아와 회원들을 세계 각국에 파견할 생각으로

이들 보호자인 풀코 주교에게 말했는데 주교는 깜짝 놀라는 것이다.

이때 도미니코는 "보리알을 쌓아 두면 썩어질 뿐이지만, 뿌려 두면 많은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마치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심같이 회원들을 2, 3명씩 전 유럽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출발은 1217년 9월 13일 부터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221년 말에는 실로 2백명의 설교 수도자들을 내게 되었다.

 

그 다음은 여자들을 위한 도미니코 제2회인 여자 수도회와,

재속 신자들을 위한 제3회도 생기고 다같이 급속한 발전을 보았다.

도미니코 자신은 로마로 가서 거기서 활약하는 한편 전 수도회 통솔 및 관리의 임무를 맡았다.

호노리오 3세 교황은 그에게 성 식스토 수도원과 그 성당을 맡겼고,

다음은 성녀 사비나 수도원과 성당을 맡겼다. 이곳이 도미니코회 총본부가 되었다.

 

먼 거리에 있는 수도원들을 도보로 순회하는 등의 힘든 활동은 그의 체력을 대단히 소모시켰다.

그러나 그는 덕을 닦고 사랑의 사업을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규율, 특히 청빈에 관한 회칙을 엄수했다.

그러므로 1220년 총회때에 그 회 회원은 재산의 소유를 금하며

자선으로써 생활하도록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나서 1년 후 비테르보에서 임종이 가까움을 알고 열렬한 사랑으로써 죽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내가 죽거든 형제들 무덤 맨 가운데 묻어주시오"하고 여러 번 원장에게 부탁하고,

1221년 8월 6일에 영원한 고향을 향해 떠났다.그 축일은 8월 4일에 지내다가 다시 8월 8일로 옮겼다.

 

 

도미니꼬회 역사의 여러 자료에서

(Libellus de principiis O.P.: Acta canonizationis sancti Dominici: Monumenta

O.P. Mist. 16, Romae 1935, pp.30ss, 146-147)

 

그는 하느님과 더불어, 하느님에 대해 말했다

 

그의 생활의 거룩함과 그 마음속에 타오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미루어 보아

도미니꼬는 은총의 뽑히운 도구임이 틀림 없다.

그는 언제나 꿋꿋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연민이나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일 때 외에는 아무 변함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기쁨 마음은 얼굴 표정을 기쁘게 만든다."라는 말이 있듯이

도미니꼬는 인자하고 기쁜 표정을 통하여 자기 영혼의 평온을 드러내 주었다.

 

그는 어디서나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복음의 사자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낮에는 자기형제들과 동료들을 대할 때 그보다 더 명랑하고 소탈한 사람이 없었고 밤에는 그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말이 적고 과묵한 편이었다.

그리고 입을 열때는 기도 중에 하느님과 더불어 대화하거나

아니면 하느님에 관해 형제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형제들에게도 이렇게 하도록 권고했다.

도미니꼬는 기도 드릴 때 하느님께 특별히 청하는 것 한가지가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게끔 해주는 그 열렬한 사랑을 하느님께구했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바칠 때만

자신이 그리스도 신비체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모두 바치신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싶어했다.

이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한 후

하느님의 감도를 받아 마침내 설교 형제회를 세우게 되었다.

 

저술과 강론을 통해서 자기 형제들이 신구약 성서를 끊임없이 연구하도록 권고했다.

언제나 성 마태오 복음서와 성 바울로의 서간들을 가지고 다녔으며,

거의 외울 정도로 열심히 읽고 연구하였다.두세 번이나 주교로 선임되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다.

주교직을 갖기보다 자기 형제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아가기를 더 원했다.

 

일생을 통해서 내내 흠 없이 순수성을 간직했다.

신앙을 위해 매맞고 몸이 산산이 찢기우면서 목숨을 바치기를 열렬히 원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도미니꼬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심 전력으로 사도적 생활 양식을 따라간 사람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서 사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시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사부 세라핌적 도미니꼬 설교 수도회 창설자

 

스페인의 칼라루에가에서 태어난 도미니코 구스만(1170-1221년)은

팔렌시아에서 수학하던 중에 그곳에서 서품된 듯 하며,

1203년부터 오스마의 주교를 수행하여 알비파 이단을 상대로 설교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또 시토회의 개혁을 도왔다.

후일 그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 수도회를 창설하여,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승인을 받음으로써

설교회 곧 도미니코회가 그 고고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도미니코회는 지성적인 생활과 대중의 요구를 잘 조화시켰던만큼

회개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는데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4차 라떼란 공의회 중에 로마에서

성 프란치스코와 만나 두 탁발 수도회의 설립자들은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또한 도미니코 성인의 요청으로 성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작은형제회의 거친 허리띠를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도미니코는

하느님의 분노로 위협받는 죄많은 세상이 성모님의 중재로 구원받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 성모님께서 당신의 아들로 두 사람을 지적했는데

한 사람은 도미니코 자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낯선 사람이었다.

다음날 교회에서 도미니코는 꿈속의 그 낯선 남자가 누더기를 입은 거지 차림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거지에게로 가서 그를 껴안고 환영하면서 "당신은 나의 친구이며, 나와 동행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결합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우리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거지는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였다.

 

작은형제회는 1658 년 총회에서 사부님 축일처럼

도미니코 축일도 대축일로 성대하게 기념할 것을 성청에 청원하였다.

1688 년 총회에서 성 도미니코를 작은형제들도 "사부(pater)"라고 부를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오랜 전통에 따라 오늘날도 세계 곳곳에서 두 수도회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는 13세기가 낳은 위대한 성인들이다.

그들은 무너져 가는 교회를 바로 세우고 양들을

주인의 울타리로 모아 들이는 동일한 소명을 받았으나 자신들의 고유한 영성에 따라

각각 다른 수도회를 세우고 맡은 소명을 수행해 나갔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복음의 가난을 실천하였고,

성 도미니코는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였다.

 

우리는 영적인 지혜가 풍부한 사람을 만나면 그만한 사람이 되거나 포기해야 한다고 느낀다.

프란치스코를 만난 도미니코는 프란치스코의 맑은 영혼과 위대한 정신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사랑을 받게 될 것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토록 위대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길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미니코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함께 일하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 맞설 수 없을 것입니다."

 

 

성 도미니코는 성 프란치스코를 경쟁자로 보지 않고 서로 협력하여

온 세계에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동료로 받아들였다.

그 날 이후 오늘날까지 도미니코 수도회와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각각 다른 카리스마로 활동하면서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홈에서www.ofmconv.or.kr)

 

 

 

 

로사리오에 대한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성 도미니꼬가 성모님으로부터 로사리오를 받았다고 말한다.

남프랑스 전설에 따르면 성 도미니꼬는

알비파와 카타리파의 이단자들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복음을 열정적으로 선포 할 때,

"로사리오에 대한 신심을 퍼지게 하라.

그 (신심) 행위로 많은 죄인들이 회개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성모 마리아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도미니꼬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고 형제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미니꼬회원들은 로사리오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15세기에 루페의 알라노와 야고보 슈프렝어 신부가 북유럽에 이 기도를 전하며 정립시켰고,

도미니꼬 회원인성 비오 5세 교황은 이 기도를 전세계에 전파하였다.

오늘도 도미니꼬회의 형제들은 날마다 묵주 기도를 바친다

 

 

 

펠릭스 구즈만과 복녀 요안나 아자의 아들인 도미니꼬는 스페인의 칼라루에가에서 태어났고,

1184년-94년 사이에는 빨렌시아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아마도 학업을 계속하는 중에 그곳에서 서품된듯 하다.

그는 1199년에 오스마에서 카논으로 임명되었다.

또 그는 1203년에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데 아베제도를 수행하여 랑꿰독으로 가서

알비 이단을 상대로 설교하였고, 씨토회의 개혁을 도왔다.

1206년에 그는 알비파 지역인 푸루일레에서 여자 수도회를 창설하였고,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강론하였다.

 

1208년에 교황 대사 베드로 까스텔난이 알비파에 의하여 피살되었을 때,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들을 상대할 십자군을 조직하고,

그 대장으로 몽포르의 시몬 4세 백작을 임명하였다. 이때의 전투는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도미니꼬는 이 군대를 따라다니며 이단자들에게 설교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214년, 시몬 4세가 그에게 까세네일의 성을 주었는데,

이때 그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위하여 활동할 수도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 수도회는 그 다음 해에 뚤루즈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으로 승인 받았다.

그러나 1215년의 라떼란 제 4차 공의회에서 자신의 설교회가 승인받는데는실패했지만,

다음 해에 호노리오 3세로부터 승인을 받고, 설교회 즉 도미니꼬회가 창설된 것이다.

 

 

그 후 도미니꼬는 수도회의 조직을 위하여 여생을 보내면서,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 등지를 다니며 순회 설교를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는 한편,

많은 회원이 입회하였고, 또 수도원도 정착 단계에 들어서게 하였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지성적인 생활과 대중들의 요구를 잘 조화시켰던 만큼

회개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는 면에서 크게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는 1220년에 볼로냐에서 수도회의 첫번째 총회를 소집하였고, 그 이듬해 8월 6일에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헝가리 순회 선교에서 얻은 병으로 일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그는 1234년에 시성되었으며, 천문학자의 수호 성인이다.

 

도미니꼬는 어느 곳을 가거나, 누구와 함께 있거나, 항상 사람들을 격려하는 말을 했다.

그는 많은 교훈적인 이야기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세속을 하찮게 여기도록 이끌었다.

어디에서나 그는 말과 행동으로 복음의 사람다운 모습을 보였다.

낮에는 형제들과 동반자들 사이에서 그만큼 다정한 사람이 없었으며,

밤에는 그만큼 온전히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온갖 탄원을 바치는 데에 몰두하는 사람이 없었다.

 

 

 

 

St Dominic of Guzman - COELLO, Claudio

Oil on canvas, 240 x 160 cm.Museo del Prado, Mad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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