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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09 14:02
볼로냐의 성녀 카타리나 동정
 글쓴이 : 기도의집
조회 : 11,136  
 



축일:5월9일(3월9일)
볼로냐의 성녀 카타리나 동정
Saint Catherine of Bologna, Poor Clare V (RM)
Santa Caterina (Vigri) da Bologna Vergine

Born:8 September 1413 at Bologna, Italy as Catherine de Vigni
Died:9 March 1463 at Bologna, Italy
Canonized:22 May 1712 by Pope Clement XI
Caterina = donna pura, dal greco = pure woman, from the Greek
Patronage:art, artists, liberal arts, painters, temptations
O.S.C.(Ordo Sanctae Clarae)

카타리나 비그리(1413 - 1463)는 볼로냐 태생으로 타고난 매력과 지성으로 인하여
페라라에 있는 친척 마르끼스 에스테의 저택에서 폭넓고 깊이 있는 문화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동정 생활을 동경하며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어떤 정배도 원하지 않았다.
또한 14세 때부터 이미 3회 회칙을 따르며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 17 세가 되던 해, 경건한 페라라 여인들의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여인들은 몇 년 후에 왕족의 공주가 페라라에 설립한 "가난한 글라라" 공동체에 합류하게 된다.

카타리나는 페라라 공동체에서 신앙 깊은 수도자로서 또한 젊은 수도자의 추앙받는 지도자로서 25 년 동안 봉사하였다.
고향인 볼로냐에 파견 명령을 받고 15 명의 동료 글라라회 자매들과 함께 볼로냐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젊을 때부터 좋지 않은 건강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공동 생활에 있어서 항구적인 평화의 원천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Saint Catherine of Bologna-Guglielmo Giraldi
Italian, Ferrara, about 1469
Tempera colors, gold paint, gold leaf, and ink on parchment
4 1/4 x 3 1/8 in. MS. LUDWIG IX 13, FOL. 185V


가타리나는 ’순수한’이란 뜻이다.
법률가이자 외교관의 딸인 그녀의 어릴적 이름은 카테리네 데 비그리 인데,
그녀는 데스테의 니콜라스 3세의 궁중 시녀로 일하였으며, 여기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녀는 궁중을 떠났으며,
준 수도생활을 하려는 일단의 부인들과 함께 페라의 프란치스꼬 3회에 가입하여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들은 후일 모두가 글라라회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그리스도와 사탄의 환시를 보기 시작하였으며, 어느 크리스마스 때 일어난 자신의 체험을 글로 썼다.

아기 예수를 팔에 안은 마리아의 환시였는데,
이 환시는 그 후부터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그림이 되었다.
1456년, 그녀는 볼로냐의 새 수도원의 원장으로 일하였다.그녀는 유능한 수련장이자 원장이었다.
그녀는 서도와 회화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으며, 뛰어난 성덕으로 인하여 그녀의 수도원은 곧 유명하게 되었고, 천상 은총이 충만하였다.
그녀가 손수 장정하고 장식한 성무일도서는 지금도 볼로냐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가타리나는 여러 책의 시와 산문을 남겼으나 간행되지는 않았다. 1712년에 시성되었으며, 미술가들의 수호성인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 콜레타가 프랑스에서 그의 덕망으로 유명하던 시대에 이탈리아에서도 성덕이 높은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성녀 클라라의 뒤를 따르는 수녀로 볼로냐의 성녀 가타리나였다.

*성녀 클라라 동정 축일:8월11일.
*성녀 콜레타 동정 축일:2월7일.
가타리나는 1413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에 태어났다.
양친은 둘 다 귀족 가문이었고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가타리나가 일찍부터 재주의 비범함과 선행에 대해 강한 경향을 표시한 것도 아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9세 때 펠라라 후작의 요청에 따라 후작의 성(城)에 들어가 후작의 딸 엘리사벳과 같이 교육을 받았다.
두 소녀는 사이도 좋고 서로 잘 맞는 상대였지만
그중에도 가타리나의 신심면의 열심함과 지식에 대한 빠른 진보는 모든 사람들을 탄복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가타리나는 오래지 않아 라틴어를 유창히 배워 어려운 말들도 읽고 말하고 쓰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의 필적은 지금도 남아 있는 데 아주 아름다운 문체다. 그녀가 제일 애독한 서적은 교회의 학자들과 성인들의 저서였다.
가타리나는 수예에도 능숙하며 미술에도 재주가 있어 특히 회화 방면에 걸작품을 남기고 있다.

가타리나가 펠라라 성에 간 지 어언 3년이 되었다. 친구인 엘리사벳은 리미니 왕자와 약혼을 하고,
가타리나는 아버지를 여의어 어머니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어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다.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다시 오라고 했지만 가타리나는 이를 거절했다.
그녀는 이미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굳은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가타리나는 계속해 들어오는 혼담을 모조리 거절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가타리나의 원의대로 하라고 해서 그녀는 자기의 소원을 아무 거리낌없이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때마침 펠라라 읍에는 루치아 마스게로니라는 부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세속 사람 몇명과 함께 수도자처럼 경건한 기도와 노동을 하며 읍내 사람들에게 좋은 감화를 많이 주었다.
가타리나도 그들의 덕을 사모하며 그 자매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행복도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그것은 곧 여러 가지 시련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우선 가타리나는 고독에 대한 동경심이 날로 강해져 공동체 생활이 고통스러워졌다. 항상 동료들과 헤어질 생각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열심히 성령의 비추심을 구했고 그 결과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2의 시련은 악마의 심한 유혹이었다. 이따금 그것을 물리칠 용기조차 없었다.
이 유혹이 지나자 이번에는 다시 영육간의 고민이 일어나 마침내는 신앙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가타리나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고 모든 시련에 승리했다.
또한 자기 일생의 죄와 결점을 온전히 용서받았다는 것을 묵시받고 깊은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이러한 번민을 당하면서 많은 귀중한 경험을 체득했고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 경험들을 참고로 소책자(小冊子)를 저술했다.



겸손한 가타리나는 스스로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경건함에 탄복해 존경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베르데 후작의 부인은 가타리나 및 그의 동료들을 칭찬한 나머지 성녀 클라라의 규칙에 의한 한 수도원을 세워 주었다.
가타리나는 분에 넘치는 행복감을 느끼며 아무리 천한 일도 하느님을 위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완수했다.

그들의 빛나는 신앙 생활, 그 중에도 가타리나의 성스러운 모범은 세상의 젊은 여성들을 감동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수도원의 지원자가 많아져 가타리나는 순명으로 그들의 수련장이 되었고 그녀는 늘 읽어왔던 성서와 학자들의 저서를 토대로
수련자들을 잘 가르치고 자신의 훌륭한 모범으로 그들을 잘 인도 했다.

그녀는 하느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첫째는 구세주의 고통을, 영혼의 번뇌는 물론 육신의 고통까지 영, 육으로 느낀 점이고,
둘째는 1445년 성탄절 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나타나 거룩하신 아기 예수를 그녀의 팔에 안기게 하신 점이다.

1451년 수도원의 원장이 서거하자 자매들은 모두 가타리나가 그의 후계자가 되어 줄 것을 원했다.
겸손한 가타리나는 그 임무의 부당함을 강조하면서 모든 자매의 동의를 얻어
같은 클라라회에 속하는 수도원에서 적당한 수녀를 추대해 원장으로 삼았다.

수도회는 날로 번성해 자매들의 수가 많아졌으므로 교황의 허락 아래 다른 곳에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볼로냐 수도원이 처음으로 건축되어 장상의 명령으로 이번에는 가타리나도 사양하지 않고 원장에 취임했다.
그 당시 볼로냐 시민은 2,3의 당파에 분열되어 서로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가타리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마침내는 화해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수도원을 ’성체의 가난한 클라라 수녀원’이라 이름짓고 가능한 한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때로는 기도로 밤을 세우기도 예사였다.
그녀는 어머니가 친자식을 사랑하듯이 사랑으로 자매들을 대했고 특히 병자나 약한 자에 대해서는 극진히 돌보며 염려해주었다.
자매들 또한 규칙을 잘 지키면서 서로 화목하며 사랑하는 데 조심했다.
가타리나는 늘 수도원 안에 있었고 한 발자국도 문밖에 나간 일이 없었으나 그녀의 성덕과 기도의 힘으로 남을 위해,
그 중에도 죄인을 위해 헌신한 일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1463년 2월 25일, 죽음이 가까워 온 줄 안 가타리나는 자매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겼다.
그 뒤 체력은 시시로 쇠약해져 3월 8일 천사와 같은 경건한 태도로 성체를 영하고
기운이 솟는 대로 거룩하신 예수의 이름을 세 번 거듭 부르고 평안히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는 50세였다. 1712년에 시성되었다.(대구대교구홈에서)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어라.
그 아름다움은 점점 더 자라나서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게 달콤한 꿈들로 가득 찬 안식과 건강을 주는 고른 숨결의 편안한 그늘이어라.(존 키이츠)

볼로냐의 성녀 가타리나는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감사했다.
그는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예술가들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예술 없이도 생존할 수는 있겠지만,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다는 말이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값비싼 예술품을 소장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없다.
무엇이든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운 것들로 주변을 가꾸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약돌이나 조개처럼 자연에서 얻은 것이라든지 사진이나 나무,
골동품 같은 것으로도 얼마든지 집안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고, 그것들을 재료로 아이들과 장식품을 만들면서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거나 만들면서 기쁨과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라.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는가?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성녀 가타리나가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도록 도와 줄 것이며, 당신에게 편안한 그늘을 선사할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노력하는가? 영혼을 쉬게 하고 기쁨을 주는 것을 가까이 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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