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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23 22:49
성 첼레스티노 5세 교황
 글쓴이 : 기도의집
조회 : 12,528  


축일:5월19일
성 첼레스티노 5세 교황
Saint Celestine V, Pope
ST. PETER CELESTINE, POPE
San Celestino V - Pietro di Morrone Eremita e Papa

Born:1210 at Isneria, Abruzzi, Italy as Pietro del Morrone (Peter Celestine)
Papal Ascension:5 July 1294
(Papa dal 29/08/1294 al 13/12/1294)
Died:19 May 1296; buried in the church of Saint Agatha, Ferentino, Italy;
re-interred in the Church of Saint Maria di Collemaggio, Aquila, Italy
Canonized:1313
Celestino = venuto dal cielo, dal latino = come from the sky, the Latin



첼레스티노는 ’천국의 주민’이란 뜻이다.
이탈리아 아브루찌의 이세르니아에서 출생한 삐에뜨로 디 모로네는 시골 농부의 12 아들 가운데 일곱째로서,
20세 되던 해에 은수자가 되었다가,사제가 되려고 자신의 움막을 떠나, 마침내 로마에서 서품을 받았다.

1246년에 그는 파이졸라의 베네딕또 회원이 되었고, 술모나 근방의 몬떼 모로네에서 은수생활을 계속할 허락을 받았다.
많은 군중들을 피하여 5년을 이렇게 살다가 2명의 동료와 함께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몬떼 마엘라로 숨어들었으나,
그가 처음으로 은수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지금은 수도원이 된 몬떼 모로네로 되돌아와야만 하였다.
그는 매우 엄격한 규칙을 적용시켰지만,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274년, 그는 자신의 은수자회인 첼레스티노회를 승인받았으며,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서거 후에 정치적인 알력 때문에 2년 간의 교황직 공백 기간이 발생하자,
삐에뜨로는 추기경들에게 위협적인 인사로 말히기를, 새 교황을 즉각 선출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추기경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84세의 노령인 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294년 8월 29일에 첼레스티노 5세로 등극하여 혼란하던 교회의 키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건강과 직무의 과중함을 이유로 들어 1294년 12월 13일에 교황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와버린 유일한 교황이다.

가예따니 추기경이 그를 승계하여 보니파시오 8세로 등극하였으나,
선임자의 높은 인기가 수많은 지지자들을 만들어 그를 복위시키려는 운동으로 번졌으므로,
그는 첼레스티노를 아나니 근교의 푸모네 성(城)에 감금하였다. 첼레스티노는 이 성에서 10개월 만에 운명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지상 교회를 통치한 교황 중에는 거룩한 순교자가 많은 반면에
또한 학덕이 출중한 인물도 적지 않은데 성 베드로 첼레스티노와 같은 이는 그 중에도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아브루치의 이세르니아에서 태어난 피에트로 디 모로네는 시골 농부의 12아들 가운데 일곱 째로 집안이 빈궁한데다가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 12명의 유아를 길러야 할 중책은 어머니의 허약한 팔 하나에 달려 있었으므로 베드로는 어머니의 승낙을 얻어
부지런히 독학을 하여 사제가 되려고 결심했다.
서품 받기 전 덕행의 부족함을 염려한 그는 우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인기척 없는 모로네라는 산중에 들어가서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행과 기도로 나날이 덕해의 길로 매진하는 그의 소문이 세상에 퍼짐에 따라 그의 덕을 사모하며 제자로서 모여든 사람이 상당히 많았고,
모두 그의 지도를 열렬히 간청했으므로 베드로는 사제가 아니고서는 마음대로 남의 영혼을 돌볼 수 없음을 자각하고
드디어 로마에 가서 신품을 받고 한 목자로서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첼레스티노는 재차 산중으로 들어갔으나 곧 자기네들의 수덕의 도장으로 삼고있던 모로네 산이 개간될 운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다시 적막한 곳을 찾아 제자들과 더불어 마이엘라 산에 가서 살았지만 그후로도 제자는 계속 증가하자
베드로는 작은 것이나마 수도원과 성당을 짓고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인가를 얻어 성 베네딕토의 규율을 채용하기로 했다.
이것은 1254년의 일이었으나 그 후 똑같은 수도원이 16개소나 생겨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에게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 후 부터는 일괄하여 첼레스티노 수도원이라 하고, 베드로는 1286년까지 친히 원장으로 근무했으나
그의 은수에 대한 동경심은 도저히 버릴 수 없어 그로 말미암아 그 직을 사임하고 재차 은수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베드로가 74세의 고령에 달했을 때 우연히도 2년간이나 교황의 성좌가 공석이었으므로
추기경들은 열심히 그 자리를 채울만한 인물을 물색중이었는데, 좀체 적당한 후보자가 나서지 않아 곧 추천할 수가 없었다.
이럴 즈음 의장 라디노 마라부랑가는 특히 근심하며 이시대는 성인과 같은 교황을 요구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전부터 덕행으로 유명한 베드로를 추천한 결과 다른 이들도 다 찬성하게되어 드디어 글에게 천국의 열쇠를 의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즉시 그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 소식을 알렸을 때 베도로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겸손한 그는 노쇠한 몸으로써 그런 중책을 맡는다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깊은 산의 밀림 속에 숨어 다른 어떠한 사람이 교황으로 선임되기를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성좌에 앉을 것을 원하며 일동이 그의 행방을 탐색해 그의 거처를 발견했으므로,
이에 베드로도 이것을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즉시 주교의 축성을 받고 마침내 교회라는 노아의 배를 젓는 선두의 중책을 감당해 내게 되었다.



이에 교황이 된 베드로는 그의 이름도 첼레스티노(천국을 갈망하는 자)5세 라고 고치고
교회의 일은 주로 추기경들에게 분담시키고 자신은 역시 은수에 가까운 수도 생활을 계속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폴리 국왕 가롤로 2세는 정치적인 야망에서 첼레스티노를 로마에 두지 않고
억지로 자기의 수도 나폴리에 있게 한 후 그를 제쳐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추기경을 채용하면서 크게 세력을 부렸다.
이는 온전히 선량하고 세속 사정에 어두운 첼레스티노가 교묘히 속은 결과였다.

그때 그를 추천한 책임자인 라디노 마라부랑가는 심적 고통으로 갑자기 죽어서 세상을 떠났으며,
교황도 자신이 그 직책에 부당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건강과 직무의 과중함을 이유로 들어 나폴리 국왕의 동의하에
1294년 12월 13일에 교황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와버린 유일한 교황이다.

이같이 수개원간 교황직에 있다가 그만 둔 베드로는 재차 옛날과 같이 은수생활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가예타니 추기경이 그를 승계해 보니파시오 8세로 등극했으나 선임자의 높은 인기가 수많은 지지자들을 만들어
그를 복위시키려는 운동으로 번졌으므로 그와 같이 인망 있는 인물을 함부로 놔둔다면 이를 옹호하는 이가 많이 나와
교회에 분열의 불상사를 야기 시킬 우려가 있다하여 그를 로마에 끌고 가서 그 부근에 있는 푸모네 성에 감금 유폐하고 자유를 주지 않았다.

그래도 베드로는 조금도 원망 없이 오히려 중책을 벗어난 것을 기뻐하며 제자인 두 수사와 더불어 오로지
기도와 고행의 나날을 보내며 하느님께 교회의 평화만을 기도했다. 첼레스티노는 이 성에서 10개월만에, 즉 1296년 5월 19일에 운명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교황 敎皇 pope

"로마의 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베드로의 후계자",
"로마 교황" 등 여러 호칭으로 불리는 교황의 교회 내에서 역할을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사도들 중 첫째인 베드로에게 독특하게 수여되고
그의 후계자들에게 전달될 임무가 영속되는 로마 교회의 주교는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이 세상 보편교회의 목자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하여 교회에서
최고의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직권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교회법 제331조; 교리서 881)





■수도생활(修道生活, 라:vita religiosus,영:religious life)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교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수도생활은 바로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이다.
수도생활이란 그리스도를 보다 철저하게 따르기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는 삶이다.
이 자기포기는 보통 가난, 정결, 순명의 세가지 서원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일컬어 수도자(religiosus)라 하며, 남자는 수사(修士), 여자는 수녀(修女)라고 한다.

역사 : 교회 초창기부터 재산을 포기하고 독신을 지키며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개인의 욕망을 포기한 동정녀들과 금욕자들이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수도 생활이 시작된 것은 4세기 이후부터이다.
수도생활 운동은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하나의 반동으로 일어났는데 당시 열심한 신자들은 도시를 떠나 사막과 광야로 들어가 특수한 삶의 양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 중 에집트의 성 안또니오(Antonius)가 대표적 인물로서 그는 은수생활의 창시자이자 모든 수도자들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초기 동방 수도생활은 외딴 곳에 홀로 사는 은수생활과 함께 모여 사는 공생수도생활, 그리고 서로 가까이 모여 사는 반은수생활 등 세가지 형태가 공존하였다.
이 동방 수도생활은 서방에 영향을 미쳐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이 생겨났고, 이 규칙서는 이후 서방 수도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수도승생활(修道僧生活, 영: Monastic life , Monasticism)

수도생활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수도생활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를 더욱 철저히 추종하고 오로지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사막이나 광야로 들어간 은수자들이나 독수자들의 삶의 전통을 잇는 수도생활을 말한다.

수도승생활을 하는 수도자를 우리말로 수도승(修道僧)이라 하는데
수도승(Monachus, Monk)이란 말은 원래 불교 용어이지만 일반적으로 쓰이는 수도자(Religious)라는 개념에 포함되면서도
승려적 생활전통을 따르는 수도회들에 속한 수도자를 따로 지칭할 때 그리스도교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어 ’monos’(홀로)에서 유래했는데 원래 ’결혼하지 않은 자’ 또는 ’독신자’란 의미에서 ’홀로 사는 사람을’나타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광야에서 살던 ’은수자’(Hermit, Eremita)나 ’독수자’(Anchorite, Anachorita)를 가리켰는데
점차 그 의미와 내용이 발전하면서 후에는 ’회수도승’(會修道僧. Cenobite, Cenobita)까지 포괄하는 단어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수도승’이라 할 때 일반적으로 까말돌리회, 실베스트로회, 발롬브로사회, 올리베따노회 등
베네딕도회 연합에 속한 수도회들, 시토회, 트라피스트회, 카르투시오회에 속한 수도자들을 일컫는다.
(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훤홈에서)

*에집트의 성 안토니오 아빠스 축일:1월17일.
*성 베네딕도 아빠스 축일:7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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