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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23 22:52
카이사의 성녀 리타 수도자
 글쓴이 : 기도의집
조회 : 13,257  



축일:5월22일
카시아의 성녀 리타 수도자
St. Rita of Cascia
Santa Rita da Cascia Vedova e religiosa

Born:1386 at Roccaparena, Umbria, Italy
Died:22 May 1457 at the Augustinian convent at Cascia of tuberculosis
Beatified:1 October 1627 by Pope Urban VIII
Canonized:24 May 1900
Rita = accorc. di Margherita



리타는 마르게리타(Margherita)의 축약형이다.
1457년에 임종. 이탈리아 스뽈레또 교외 로까뽀레나에서 태어난 리타(혹은 리따)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지만, 18년 간의 결혼생활은 불행하였다.
남편은 어린 아내를 학대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싸움 끝에 살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두 아들마저 죽게 되었을 때, 리타는 카쉬아의 아우구스티노회에 3번이나 입회를 신청하였지만 번번히 거절당하였으나,
1413년에는 기어이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지난날의 생활을 반성하고 자신처럼 불우한 삶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철저한 고행과 기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또한 그녀는 수차례나 환시를 체험하였고, 1441년에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과 꼭같은 상처로 고난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1900년에 시성되었고,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이탈리아에서 살다간 많은 성인 중에서 기적의 열매를 항상 지니셨던 분이 바로 리타 성녀이다.
아펜니노 산맥의 골짜기를 들어가면 자그마한 산골이 나오는데 이곳이 성녀의 출생지인 카쉬아이다.
이곳은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났던 아시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끼리의 반목 때문에 사소한 분쟁과 혼란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그녀가 생존해 있던 l370 년대부터 15 세기 초엽까지 교회는 혼란의 거친 풍랑을 맞는 시기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1 세는 유럽 혼란을 피해 로마를 떠나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겨갔던 때였다.



리타 성녀는 출생 전부터 기적의 화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녀의 부모인 안토니오와 아마타는 늦게까지 아이가 없어, 비어 있는 요람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하루는 아마타가 열심히 기도하다 환시를 통해
"곧 너의 기도의 선물로 여자아이를 낳을 터인데 그 아이는 후에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으며
그 아이의 이름을 ’리타’라고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1381 년에 태어난 리타는 그 해 5 월 22 일 유아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지 며칠 안되어 기적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아기가 잘 쉴 수 있도록 부모는 요람을 들판 그늘에 놓고 일을 하는데
온갖 새들이 아기 주위에 찾아와 평화롭게 맴돌았으며,각종 짐승들이 아기와 대화하듯이 뛰놀았다 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절대 순종하는 효심과 깊은 신앙심이 있었다.
또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리타에 대한 부모의 바람은 달랐다.
그녀가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여자가 되길 원했다.



부모의 뜻에 따라 l2 세의 어린 나이에 `파올로 디 페르디난도’란 남편을 맞게 되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마을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며 비신자였다.
리타는 결혼시기 동안 남편으로부터 받은 온갖 고통과 굴욕을 오직 사랑으로써 극복하여 끝내는 남편을 회개시키고
결혼 18 년째 되는 해 교리반에 등록시켜 착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될 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느날 둑을 걸어가던 리타와 페르디난도는 평소에 원한을 품고 있던 `단테지’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싸움 끝에 남편은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녀는 눈앞에서 죽어 가는 남편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인간적인 심판과 복수심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나갔다.

이어 남편을 살해한 단테지란 사람을 용서하고 그를 아들의 견진 대부로 세우게 되었다.
남편이 죽은지 일년도 안되어 두 자식도 병마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30여 년 동안의 세속에서의 생활은 언제나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매 시기마다 주님께 의지하며 극복해 내었던 것이다.
홀로 된 리타는 아픔을 극복하고 그분께 결혼 전 약속했던 자신을 봉헌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카쉬아의 아우구스티노 수녀회를 찾았다.
하지만 동정녀의 모습이 아닌 그녀를 수녀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원장 수녀는 그녀의 깊은 신앙심을 보고 훌륭한 수도자가 될 것임을 알았으나 규칙상 과부는 입회한 전례가 없어 허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리타는 기도와 고행, 선한 일 등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며 어떤 모습으로든지 자신이 받아들여지기만을 기다리며 간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기도하는 리타에게 그녀의 전구를 들어주던 수호성인들이 찾아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굳게 닫힌 아우구스티노 수녀원 안뜰의 지하 기도방으로 인도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날 아침 공동기도를 위해 기도방에 내려온 수녀들은 입회가 허락되지 못했던 그 부인이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으며,
이 사건에 대해 원장 수녀는 주님 은총의 징표임을 확신하고 수녀원 생활을 허락하게 되었다.



영신적으로 단련되어 있는 그녀에게 있어 수련기는 더욱 굳센 바탕이 되었다.
항상 고요한 곳을 찾아 묵상을 즐겼다.
그리고 인간이므로 가질 수 있는 욕망이 사라질 때까지
돼지털로 짠 거친 수도복 속에 많은 가시를 넣어 자기 몸을 찌르면서 생활하였다
수녀원 생활이 시작된 이후에도 리타 성녀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보살핌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정원 한구석에 이미 말라죽은 포도나무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해 계속 물을 주고 기도하는 것을 여러 동료 수녀들은 어리석다고 비웃기까지 했으나,
어느 화창한 날 죽어 있었던 포도나무 가지의 잎사귀가 움트고 포도가 듬뿍 열린 기적이 나타났다.



종신 서원을 받을 때에도 하늘의 징표가 내렸는데,
자신을 받아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묵상 중에
갑자기 계단이 하늘에서 내려와 길게 놓여지더니 그 꼭대기에 예수님께서 성좌에 앉아 계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채를 띤 예수님은 인자하신 모습으로 그녀를 향해 올라오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그후 원장 수녀가 된 리타 성녀는 수녀원의 구석 구석을 살아있는 수도원이 되게 가꾸었으며 따라서 지원자들도 많아졌다.



심신의 고통과 단식, 계속되는 보속의 생활로 인해 결국 리타 성녀는 건강을 잃게 되었고,
몸져 누워있는 동안 전혀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성체를 영할 수 있는 배려가 내려져 그 성체를 영하는 힘으로 간신히 생명을 지탱해 갔다.
오랜 투병생활 동안에도 그의 영혼은 견고하고 깨끗했으며 병자의 얼굴이 아닌 항상 밝은 모습을 지녔다.

그의 친척들이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전, 리타 성녀에게 무엇이든 부탁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하자,
그 추운 겨울 고향에 있는 자기 집 텃밭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갖다 달라고 했다.
친척들은 이 겨울에 어디서 장미꽃을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텃밭에 가보니
과연 엄동설한에서도 한 송이 장미꽃이 의연히 피어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세상에 보여주시고 가셨다.



l595 년 시복되고 l900 년에 시성된 리타 성녀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수녀원 내부에 안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얀 피부를 유지하고 부패되지 않았으며
l828 년 그녀 시복 축하 축제 때 혼잡한 축제 분위기를 경고하는 듯 몸이 움직이고 눈이 떠져 현재까지 두 눈이 떠 있는 상태이다.
리타 성녀의 축일은 5 월 22 일에 지내고 있다.

그녀 스스로 과거의 절망과 아픔을 극복하였듯이, 세상 저 아래서 구원받지 못하는 가련한 이들과
매순간 한탄과 절망 속에서 헤매이는 모든 이들에게 리타 성녀는 하느님 안에서의 희망과 꿈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정녕 결백하고 완전한 사랑은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며 더욱더 하느님의 종임을 채찍질해야함을 가르치고 있다.





큰 계획

리타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살해되자 복수를 맹세했다.
그러나 리타는 아들들이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그들을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아들들은 자신들의 뜻을 행동에 옮기기 전에 병에 걸려 죽었다.

성녀 리타는 분명히 자신이 기도했던 대로 응답을 받았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
우리는 사고 영역이 아주 제한적이어서 눈앞의 좋은 것만을 구하지만, 하느님은 영원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보신다.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곳이 월급을 많이 주는 직장이라면 당신은 꼭 채용되게 해 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이 그 직업을 갖지 않기를 바라실 수도 있고,
그 일이 당신의 영혼에 해악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당신을 떨어뜨리실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될 때, 우리를 잘못된 판단에서 구해 주셨음을 믿고,
앞으로 주실 축복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자.
당신이 원했던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큰 축복이 되었던 경험은 없는가?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은 알고 계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서재의 聖 아우구스티누스-Alessandro Botticelli
1480.Fresco. 피렌체 옹니생티 성당 소장. ltaly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영성

한마음 한뜻(Anima Una et Cor Unum)으로 대표되는 수도회의 영성은,
먼저 자기 자신과의 일치 그리고 이웃과의 일치, 형제들과의 일치,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회원의 정신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띠노의 정신과 은수적인 전통에서 유래된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영성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이고 세분화하여 요약할 수 있다.

1. 내향성(內向性, Interiority):
아우구스띠노회의 영성은 산란한 마음으로 인한 혼란과 불안을 떨쳐버리고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너 자신으로 돌아가라. 진리가 인간 내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네 마음이 변덕스럽다고 생각되면, 너 자신을 넘어서 … 이성의 원천이신 하느님께로 다다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와 관상이 아우구스띠노회의 수도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니, 오, 주여,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의 맘은 쉼이 없나이다. (고백록 1권, 1장)

2. 공동체:
"우리의 제일의 사도직은 공동체 생활입니다"라고 아우구스띠노회 회원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공동체가 형제애의 정신과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특징지어짐을 나타낸다.
물론 이 말이 우리 이웃에 대한 사도적 봉사와 사랑의 봉사의 중요성을 격감시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봉사의 기초를 보다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이는 회헌의 다음 구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아우구스띠노회 공동체는 개개인의 개성을 잃게 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서로간의 충실함과 신뢰, 성실함과 상호 이해를 돕고 유지하도록 하는 우정의 산물이므로 오히려 개성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우정은 우리고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함께 모이도록 한다." "다양성 안의 일치"란 이 영성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우선적인 관심을 공동선(共同善)에 둔다고 해서 개인의 권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띠노회 초기의 신학자인 로마의 애지디오(Giles of Rome)는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반대 의견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막을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3. 그리스도 중심의 삶: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수도생활의 궁극적인 모범이며 삶의 표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적 형제애로 공동체를 이룰 때 하느님 안에서 생활하는 공동체 생활을 함께 누릴게 될 것이다.
"여럿인 우리가 단 하나의 마음을 가질 때, 그분은 우리를 그런 일치에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설교 103. 3,4)
성 아우구스띠노는 그리스도의 모든 점, 특히 겸손과 봉사의 모습을 닮으라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무시켰다.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눠 지라"고 간곡히 권한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은 형제, 자매들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4. 교회에 대한 봉사:
아우구스띠노 수도회는 초창기부터 교회의 필요에 응해 왔다.
성 아우구스띠노 자신도 연구와 성찰하는 자신의 개인 시간에 크게 가치를 두었으나,
활동과 교육에 있어서 사도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그 자신을 결코 아끼지 않았다.
그의 편지 중에 "교회의 필요에 응하기보다 자신의 평화로운 여가 시간을 더 좋아하면 안 된다.
만일 생명을 준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없다면, 생명의 근원을 발견할 길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수도회의 규칙서
다양한 아우구스띠노의 규칙서의 필사본들이 중세기 동안에 지속되던 규칙서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띠노의 규칙서는 그보다 120여 년이나 지난 뒤에야 저술된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에 의해 그 빛을 잃고 말았다.
아우구스띠노 규칙서가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11세기 유럽의 수도원 개혁과 대성당 참사회의 기초가 되면서였다.

파리에 있는 성 빅토르 대수도원과 로벨또 수도회(Canons Regular of Premontre)의 법규로, 그리고 라테란 공의회의 교회법에 인용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은수자들의 공동체, 예를 들어 1225년 선한 요한 수도회(John the Good)와 1244년 투스칸의 은수자들에게 주어졌다.
’아우구스띠노 규칙서’는 수도생활 초기에 씌어진, 본문이 10여 쪽에 불과한 짧은 저서이다.
그러나 서방의 수도생활 저서들 가운데서 이 저서와 비교할 만큼 영향을 미친 저서도 드물 것이다.
’아우구스띠노 규칙서’는 현재 서방 세계의 가장 오래된 수도 규칙서로써,
’베네딕도 규칙서’보다 약 120년 전에 그리고 ’프란치스코 규칙서’보다 약 800년 전에 씌어졌다.

’아우구스띠노 규칙서’가 여러 시대를 거쳐오면서 그 중요성을 지녀 왔으며,
그리스도교의 수도생활의 초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규칙서가 지니고 있는 영적인 풍부함 때문이다.
이 규칙서에 내포되어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통찰과 깊은 사상 그리고 사랑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완덕의 고원한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수도생활,
이 모든 것들은 여러 시대를 거쳐오면서 계속 이 규칙서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규칙서에는 아우구스띠노 자신의 카리스마적 개성, 즉 하느님과의 친교,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 사도적 가난과 헌신, 봉사와 친절의 마음 등을 반영하고 있다.

’아우구스띠노 규칙서’에서는 수도생활 순서와 생활양식에 대한 세세한 점이나 외적 구조 문제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 수도원 안에서의 모든 일상생활의 세부사항을 규정하려 하는 ’베네딕도 규칙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우구스띠노는 본질적 요소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영위되어야 하는 수도생활의 주된 골자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가 우리 세기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본질적 요소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아우구스띠노 규칙서’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먼저 성서에 철저하게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10여 쪽에 불과한 규칙서의 내용 중에서 적어도 35번 성서를 언급(구약 8번, 신약 27번)하고 있다.
그리고 짧은 문장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인 영감은 성서를 바탕으로 하여 성서의 여러 구절을 조합하여 저술한 것이 많다.
즉, 규칙서의 확고한 구성은 바로 성서적 그리고 복음적 토대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세기와 문화의 변화 속에서도 규칙서가 그 가치를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이다.

또한 규칙서의 근본적인 이상은 사도행전(4,31-5)에 묘사된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를 그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개인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공동의 것으로 하며, 한마음 한뜻에 되었다"라는 성서의 말씀은
그가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추구하였던 이상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 이웃을 사랑할지니,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첫째가는 계명이기 때문이다.(규칙서 1장 1절)
우리가 하나로 모여있는 첫째 목적은 화목하게 살며, 하느님 안에서 한마음과 한뜻이 되는 것입니다.(규칙서 1장 3절 ; 사도 4,32)
- 과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한다면, 금욕주의(Asceticism)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에게 있어서 청빈과 금욕의 의미는 물질의 포기뿐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원하는 마음까지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발적인 검소한 삶이 내적인 해방과 동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술의 찬양과 마음의 찬양, 외면과 내면, 이론과 실천, 이상과 현실이 일치된 삶을 궁극적인 수도생활의 목적으로 여긴 것이다.

현재 아우구스띠노의 규칙서를 사용하는 수도회로는,’ 아우구스띠노 수도회(Order of Brothers of Saint Augustine’,
’아우구스띠노 참사수도회(Canons Regular of St. Augustine)’, ’레골렉트 아우구스띠노회(Augustinian Recollects)’, ’성모 승천회(Assumptionists)’,
’성 도미니코 수도회’,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성 노벨또 수도회(Norbertines : Canons Regular of Premontre)’, ’아우구스띠노 관상 수녀회’,
’성 도미니코 수녀회’, ’성 우르술라회(Ursulines)’, ’빌라노바의 성 토마스 수녀회’, ’성녀 리따 수녀회’, ’성녀 모니카 수녀회’, ’착한 목자 수녀회’,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 수녀회’, ’마리아 종 수녀회’ 그리고 방인 수도회로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성가 소비녀회’ 등의 수 많은 남녀 수도회에서 규칙서로 사용하고 있다.
(성아우구스티노 수도회홈에서)



당신은 내 안에 계셨으나 나는 밖에서 당신을 찾았으며,
당신의 피조물 안에서만 구했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계셨으나
난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물들이 당신께 멀리하게 하며
당신께서 그들을 창조해 주시지 않았으면
존재조차 없는 이 것들이"(고백록X,27,38)

-성 아우구스티노-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축일:8춸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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