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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26 11:57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글쓴이 : 기도의집
조회 : 12,975  



The Virgin Appearing to St Philip Neri - TIEPOLO, Giovanni Battista
1740. Oil on canvas, 360 x 182 cm Museo Diocesano, Camerino


축일:5월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Saint Philip Neri
San Filippo Neri Sacerdote
St. Philippus Neri, C

Also known as
Philip Romolo Neri; Apostle of Rome; Amabile Santo
Born:22 July 1515 at Florence, Italy
Died:27 May 1595
Beatified:11 May 1615 by Pope Paul V
Canonized:12 March 1622 by Pope Gregory XV
Congregation of Priests of the Oratory
Filippo = che ama i cavalli, dal greco = that it loves the horses, from the Greek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성 필립보 네리 사제(1515-1595년)는 18세 때의 신비 체험을 하고
1533년 로마로 가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로마에 가서 젊은이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을 연마했으며 병들고 가난한 이를 돌보는 형제단을 구성했다.
1551년 사제가 되기까지 당시로는 드물게 평신도 사도로서 기도와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며 살았다.

고해 사제로 명성을 얻은 그는 1564년, 뜻을 같이하는 동료 사제들과 ’오라토리오회’를 세워 모국어로 기도를 바치고 자선 사업 등에 힘썼다.
특히 익살스럽고 쾌활한 성품으로, 사람들이 자칫 딱딱하게만 느낄 수 있는 신심 생활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복음적 단순성, 하느님을 기쁘게 섬기는 데에 뛰어났다. 1595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171, 1-3. 5: PL 38, 933-935)

주님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지 세상을 두고 기뻐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말해 주는 대로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
"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세상과 주님 안에서 함께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승리를 거두어 세상을 누리는 기쁨이 날로 증가하고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은 날로 감소하여 사라지도록 하십시오.
이 말은 우리가 세사에 있는 동안 기 뻐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도
이미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기뻐한다면 내가 있는 곳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여러분이 세상에 있다고 해서 주님 안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까?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로가 아테네인들에게 하는 설교에서 우리 주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해 하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 그러면 어디에나 계시는 분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로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늘 위에 드높이 오르시면서도 동시에 지상에서 살고 있는 이들과 가까이 계시는 분이 참으로 무한한 분이십니다.
멀고도 가까이 계시는 이분이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가까워지신 그분이 아니라면 누구이겠습니까?

전인류는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 길바닥에 누워 있는데 사제와 레위는 못본 체 지나가 버리고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부축하여 간호해 주고 돌보아 주었던 바로 그 사람과 같습니다.
불사 불멸이시고 의로우신 분께서는 죄인이고 죽어야 할 우리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셨지만,
멀리 떨어져 계신 그분은 우리의 이웃이 되시고자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대로 갚지도 않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증명합니까?

외아드님께서는 외아들로 홀로 남아 계시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홀로 죽으신 그분은 홀로 계시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은 하느님의 많은 자녀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피로써 형제들을 사들이시고, 당신께서 단죄받으심으로 단죄받은 이들을 구하시고, 팔려 가심으로 그들을 속량하시고,
모욕당하심으로 그들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셨으며, 죽으심으로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가톨릭홈에서)



필립보는 ’말(馬)의 친구’란 뜻이다.
필립보 네리는 부패한 로마와 무관심한 성직자들을 배경으로 한 문예 부흥 이후의
전반적인 타락상에 대항하여 대중을 신심으로 유도한 귀항 운동의 기수이다.
젊었을 때 그는 사업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플로렌스에서 로마로 옮겨 하느님께 자신의 생활과 능력을 바쳤다.
3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사제가 되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 후 13년간은 그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소명의 길인 평신도 사도로서 기도와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면 살았다.

트렌트 공의회가 교의적 수준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있을 때
필립보의 인격적 호소로 말미암아 거지부터 추기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이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과감한 영성에 압도된 몇몇 평신도들은 자기 주위에 재빨리 모아 처음에는 비공식적인 기도와 토론을 하였으며
후에는 로마 교회의 필요에 따라 봉사를 하는 단체가 되도록 했다.

고해 신부의 권고로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언제나 친절하고 때로는 농담까지도 잘하는 그는 다른 사람들의 위선과 착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은사로 받아 훌륭한 고해신부가 되었다.
그는 성당 위층에 있는 방에서 고해 성사를 보러 온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함께 기도했다.
그는 때때로 사람들과 다른 성당으로 산책을 가면서 어떤 때는 도중에서 노래와 간식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사제가 되어 공동체에서 그와 함께 살았다.
이것이 그가 설립한 수도원이 오라토리오회의 시작이다.
그들 생활의 특징은 모국어로 된 찬미가와 기도를 바치면서 매일 오후에 4번의 비공식적 담화로 경배를 하는 것이다.
팔레스트리나는 필립보의 추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데 전례를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

오라토리오회는 평신도들이 설교를 하고 모국어로 찬미가를 바치는 이단적인 집회라고 오랫동안 비난을 받으며 시련을 겪다가
마침내 교회에서 인준되었다. (뉴만 추기경은 처음으로 영어로 말하는 오라토리오회를 만듬)

그 당시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필립보의 충고를 따랐다.
그는 주로 교회 안에서 많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거룩한 인물로 만듦으로써 종교 개혁의 중요한 인물들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덕행은 겸손과 쾌활함이다.



많은 사람들은 필립보처럼 매력적이고 익살스러운 인물은 진지한 영성에 젖을 수 없다고 잘못 생각한다.
필립보의 생활은 신심에 대한 우리의 딱딱하고 옹졸한 안목을 변화시켜 준다.

성덕에로 향하는 그의 접근 방법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쾌활한 웃음을 동반하는 것으로 참으로 가톨릭적이다.
필립보는 그의 추종자들이 성덕에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통하여 비인간적이 되지 말고 더욱더 인간적이 되기를 바랐다.



필리보 네리는 이렇게 기도했다.
"오늘을 철저히 살게 해주소서. 그러면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겠나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가난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필립보 네리는
산 마르코(San Marco)의 도미니코회에서 교육받고 부유한 상인인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 로마에서 살았다.

항상 낙천적이고 명랑, 활발한 성격으로 ’피포 부우노’ 즉 ’착한 피포’라는 애칭을 얻은 그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웃을 돕고
기도에 힘쓰는 단체에 가입했으며 사제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가면서 그 자신이 주변 젊은이들을 모아 종교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 단체는 정규 성직자 단체의 규칙에 기반을 둔 것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가를 부르며
구체적이고 활발한 자선사업을 전개해 수많은 젊은이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었다.
소년과 남자들을 위한 신심 단체인 오라토리오회(Oratorians)가 창설된 것이다.
음악의 한 형식인 오라토리오가 생겨난 것도 이 때부터이다.



필립보 사제의 친구들 중에는 당대의 유명한 종교인들이 많은데 이냐시오, 카롤로, 카밀로, 프란체스코 디 살레스 그리고 당시의 교황이 그들이다.
가난한 이들고 병든 이웃 그리고 미천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자선이 넘치는 참된 종교적 삶은 기쁨이 넘치는 영혼으로부터 탄생한다.

참회를 해야하거나 혹은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일 때에도 성찬식의 ’환희의 찬가’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해주고,
우리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축복받은 사람들’로 확신하게 해주면서 성스러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축일:7월31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축일:11월4일.
*성 가밀로 데 랠리스 사제 축일:7월14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축일:1월24일.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수도자 축일:5월18일.



The Virgin Appearing to St Philip Neri - PIAZZETTA, Giovanni Battista
1725. Oil on canvas, 367 x 200 cm Santa Maria della Consolazione (Fava), Venice.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 4).

필립보 네리는 이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일생의 표어로 삼은 성인이었다.
필립보 보노(선량한 필립보)라 하면 당시의 로마 시민으로서 누구 하나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1515년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소년 시절의 일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때부터 정결하고 욕심이 없고 쾌활 명랑한 성격이었으며, 게다가 성직자가 되기에 합당한 하느님의 지도가 있었을 것이다.

필립보 네리의 백부는 상당한 재산을 가진 상인이었으나, 불행히 뒤를 이을 자녀가 없었으므로
18세가 된 필립보를 양자로 삼아 자기의 가업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 상당히 많은 유산을 남겨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필립보는 그러한 재물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청빈한 생활을 동경하여 일체를 포기하고, 로마에 가서 16년이란 오랜 세월을 친절한 친구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의 두 자녀의 교육을 유일한 업으로 삼고 검소한 생활을 계속하며, 틈만 있으면 시내의 성당, 카타콤바 등을 순례하고
기도에 몰두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특히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바나 무수한 순교자의 성혈로 물든 원형극장에는 12년동안 거의 날마다,
때로는 밤중에도 참배하며 자신도 그러한 순교자와 같이 신앙이 견고해지기를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성 세바스티아노 순교자 축일:1월20일.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그의 성의를 기뻐하셨음인지 1544년의 성령 강림 대축일 전날,
필립보가 해오던 대로 카타콤바에 가서 기도를 바치고 있을 때 특별한 은헤를 받게 되었다.
즉, 한없는 성스러운 사랑이 충만되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느끼며
갈빗대 두 대가 부러지면서 가슴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 상처는 일평생 낫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교회 내에는 불행히도 냉담적인 폐풍이 충만해 있었다.
필립보는 될 수 있는 데까지 이 같은 신자에게 신앙을 북돋아 주려고 힘쓰는 동시에 병자나, 빈궁자나, 먼 곳에서 온 순례자의 구제 등
육신의 자선 사업에도 노력하며, 또한 무엇보다도 영적 사선사업을 중요시하여 죄인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도록 주선해 주었다.



필립보의 사랑으로 가득 찬 인품과 쾌활한 성격은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했다.
그 중에도 마을내의 아이들은 진심으로 그를 따르며 같이 놀기도 하고, 교리를 배우기도 하고,
또한 성당에 참배하는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필립보에게 "이처럼 아이들이 떠들어서야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하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아니오, 죄만 짓지 않는다면 나의 등 위에서 장작을 패도 괜찮습니다"했다고 한다.
이로써 얼마나 그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사모한 것은 아이들뿐이 아니었다. 때로는 마을내의 사람들도 그의 주위에 몰려와서
천상의 영감에 충만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깊은 감동을 느끼며 개과천선의 마음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필립보는 세상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나 아직까지 성직자는 아니었다.
그의 고해 신부는 이같이 덕이 많고 독실한 사람을 평신도로 두는 것이 아깝다 생각하고 자꾸 신품 성사 받기를 권유했으므로,
필립보는 드디어 결심하고 1551년에 서품되어 사제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깊은 마음, 겸손한 태도, 쾌활한 성격, 검소한 생활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여기에 더하여 또 착한 목자이신 예수를 본받아 방황하는 양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일이 첨가되어 그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고해를 들으면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며 자신의 수고를 조금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필립보는 또한 각 방면의 사람들을 수명씩 자신의 좁은 방에 모아 놓고 교훈을 하며 종종 묵상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를 희망하는 이가 점차 증가해 자기 집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더 넓은 곳을 구해 한층 더 사도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그 집회의 장소는 오라토리오(기도의 집)라고 이름 지어져 그 뒤 성인의 덕을 사모하는 이들이 모여 결성한 오라토리오 수도원의 발상지가 되었다.
교황의 명령에 의해 그 사람들의 지도자로 된 이가 필립보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는 또한 축일에는 신자들을 인솔하고 로마의 옛 성당을 참배했다.
특히 사순시기 직전의 사흘간 거행되는 세속적인 행사 사육제(謝肉祭; 가톨릭교 국가에서 사순시기 직전의 3일동안 술과 고기를 먹으며
가면을 쓰고 행렬하거나 연극과 놀이로 즐거이 노는 날)에는 자진해 순례의 행렬을 개최하고 이로써 세인의 죄를 보속했다.

성인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가령 교황 레오 11세는 그와 함께 담화하기를 즐기며 종종 4, 5시간이나 그의 방에 머물며
"이곳은 나의 낙원"이라고 말했고, 또한 클레멘스 13세나 그레고리오 14세는 전에 성인께 교훈 받은 것을 최상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가롤로 보로메오와 이냐시오 성인은 필립보와 친밀히 교제하고, 또 대 음악가 발레스트리나는 기꺼이 그를 고해 사제로 모셨다.



보통인물 같으면 그러한 위대한 인물들에게 그렇게까지 존경을 받는다면 교만한 마음이 생겼겠지만,
필립보는 조금도 불손한 빛이 없었고 오히려 더욱 겸손하며 그로 말미암아 진기한 행위를 감히 행하는 때도 있었다.
가령 수염을 한쪽만 깎고 넓은 거리를 걷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책을 읽을때 일부러 아이들의 반말을 흉내내기도 하고,
이사할 때에 주방도구를 갖고 나와서는 우스운 행동을 보여주는 때도 있었다.

이는 모두 남에게 조롱을 받으리라는 겸손함 마음에서 행해진 것인데, 그의 높은 성덕을 아는 이들은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점점 존경의 마음을 더 가져, 교훈을 청하는 이, 전구를 구하는 이들이 연달아 그를 방문했다.

그가 미사 성제를 거행할 때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고 그의경건한 태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한다.



성인에게도 어느덧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졌다.
병으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된 필립보는 병상에 누어서 벽에 걸린 주님의 십자가상에 손짓하며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저처럼 고통을 참으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계시는데,
이 미천한 저는 이런 호화스러운 자리 위에서 친절한 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면 쉬고 있습니다.
얼마나 염치없는 노릇입니까?"하고 눈물을 흘리며 곁의 사람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1595년 5월 25일,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원하는 자는
참으로 해야 될 일을 모르는 자다"하는 말을 최후로 그 순결한 영혼을 하느님 아버지께 돌려 드린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선입견

우리는 항상 가설을 만든다.
“아침이면 해가 떠오를 것이다.”라든지 “지구 중력의 법칙은 계속 작용할 것이다.”처럼 논리적이고 자연적인 가설도 있지만,
사람에 대해서 어떤 가설을 세우고 선입견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성인들에 대해서도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분들은 거룩함의 모범이기 때문에, 훌륭하고 좋은 분들이기는 하지만 근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 필립보 네리가 프란치스코 드 살이나 가롤로 보로메오와 같은 성인들을 따르려고 했던 것을 보면서
그야말로 ‘근엄의 화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진지한 면이 있는 반면 유머 감각이 뛰어났던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두 권의 책이 신약성서와 유머집일 정도였다.

심지어 필립보 네리는 고해성사를 줄 때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
한번은 어떤 수다쟁이 여인이 고해성사를 보러 왔는데 새의 깃털로 만든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필립보 네리가 깃털 가방을 달라고 하더니 그것을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당황해하는 여인에게 땅에 흩어진 깃털들을 다시 주워 모으라고 했다.
수다쟁이 여인이 흩어진 깃털들은 다시 모으기 어렵다고 말했더니
필립보는 함부로 내던진 말은 흩어진 깃털처럼 다시 주워 담기 어려운 법이라고 했다.

남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 적은 없었는가?
사실을 정확히 알기 전에는 남을 판단하지 않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트리엔트 공의회’ 가톨릭 교회 내부의 개혁 이루다.

중세 말기에 들어서면서 교회와 교황직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교회의 개혁이었다.
원래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특히 당시에는 교회에 폐해가컸고 또 많았기 때문에
더욱 교회개혁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었다. 당시 교회의 폐해중에는 물론 교황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간의 개별적 배신은 언제나 있었고 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배신이 제도 자체에서 기인할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중세 말엽부터 교황직은 더욱 불완전해졌다. 또 불완전한 교황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교황들이 앞으로 교황을 선출하게 될 불완전한 추기경들을 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교황들은 교황령을 미화하고 확장하고 자신의 명성을 얻으려는 세속적인 일에 골몰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교황이 용감히 개혁을 시도해 보려해도 당시의 상황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하드리아노 6세 같은 교황은 그 좋은 예이다.
그는 진지하게 개혁을 시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예부흥기의 교황들에게 있어서 교황령에 대한 지나친 걱정과 이로 말미암은 족벌주의는 교회개혁을 적시에 실현할 수 없게 하였다.
사람들은 문예부흥기의 교황들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업적에 경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본연의 사명과는 비교할 것이 못된다.
이 시기의 교황들에게 있어서 보다 큰 문제는 알렉산델 6세를 위시한 대부분의 교황들의 윤리적 배신이 아니라,
교황직에 임하는 그들의 근본 자세였다.
성직 매매까지 낳게 한 이런 책임은 물론 교황을 선출한 추기경단에도 없지 않으나,
그 교황이 또 그런 추기경들을 임명했다는 점에서 최종책임은 교황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루터가 교회개혁을 자처하고 일어났다.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는 문제를 과소평가하고, 루터의 논제를 단순한 수도자의 언쟁으로 처리하였다.
교황좌에 오르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황직을 향유합시다"고 한 자신의 말과 같이, 그는 교황직을 향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비록 루터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그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였다.
이 점에 있어 칼 5세 황제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교황들에게 시급히 공의회를 소집하여 줄 것을 촉구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교황들은 정치적으로 황제와 대립되어 있었고 그래서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황제의 당연한 요청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온 교회가 머리와 지체의 개혁을 위해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마지 않은 공의회가, 마침내 1545년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에 의해 소집되었다.
이로써 바오로 3세는 후세에게 개혁교황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아직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이었으나 처음으로 개혁을 진지하게 시도한 사람이 되었다.
바오로 3세는 추기경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영적 임무에 적합하지 못할뿐더러 개혁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추기경으로 있을 때, 즉 1527년에 로마가 당한 약탈과 점령에서 하느님의 시련을 깨닫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교황이 되자 그는 추기경단의 개혁부터 시작하고, 개혁투사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개혁위원회를 구성하고, 교회개혁안을 작성케 했다. 이 개혁안은 그 후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안으로 채택되었다.

바오로 3세는 무엇보다도 그간 공의회의 실현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온 칼 5세와 공의회 소집에 합의함으로서
교회의 숙원이었던 공의회를 성취시키게 되니, 이것이 유명한 트리엔트 공의회이다(1545-1563).

이상에서 우리는 공의회의 성취가 얼마나 어려웠고, 또 그 경위가 얼마나 복잡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공의회가 개최된 이후에도 두 번이나 중단되어야 하는 등, 공의회의 활동 자체도 이에 못지 않게 긴장되고 복잡한 것이었다.
1545년 12월 13일 겨우 1명의 교부들과 3명의 교회특사가 참석한 가운데 개회식을 가졌을 때
그것이 가톨릭 근세교회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턴티즘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의 최고의 교도권으로부터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가톨릭의 신앙교의에 대한 명확한 선언이었고, 동시에 가톨릭 교회내부의 자각이요 참된 종교개혁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참으로 훌륭한 공의회였다.
그러나 아무리 공의회 자체가 훌륭했다 하더라도 공의회의 결의를 실천에 옮길 위대한 교황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공의회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공의회 직후 위대한 교황이 3명이나 이어졌으니, 그것은 시대적 요구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요 선물이었다.

교황성좌는 3백년만에 성인교황을 갖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공의회 직후 교황위에 오른 성 비오 5세(1566-1572)였다.
머리의 개혁을 통해 교회쇄신의 진리성을, 지체들에게 확신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교황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의회 정신을 따라 교회 전체를 내적으로 쇄신하는 것을 교황직의 제일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다.

교황직 자체의 쇄신을 위해 그는 추기경단부터 철저하게 개혁하고, 종교적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로 추기경단을 보완하고,
그들에게 교회의 개혁사업을 위촉하였다. 또한 교회개혁의 일환으로새로운 교리서, 미사 경본, 성무일도 등을 간행하였다.
그는 공의회 이후의 가장 위대한 개혁 교황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후계자들도 그가 시작한 일을 성공적으로 지속시켰으니,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는 특히 학문분야에서,
식스토 5세(1585-1590)는 특히 성청의 개혁에서 각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역사 안에서의 교황,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비오 5세 교황 축일:4월30일.
*트리엔트공의(公議會)라틴어 Concilium Tridentinum. 영어 Council of Trent (가톨릭대사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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